소  감  문




6167 변증현






 이번 하계 입영 훈련은 이전의 여러 훈련들과는 사뭇 많이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임관 전의 마지막 훈련이다 보니 그냥 장교 후보생이 아니라 ‘장교 임관’을 앞둔 후보생으로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사실 그 이전 훈련 받을 때는 사실 장교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번 훈련에서는 훈육관님들과 교관님들이 ‘장교 임관’을 앞둔 후보생으로서의 자세를 강조하셔서 ‘과연 나는 얼마나 장교로 임관할 자세가 되어 있는 가’를 스스로 많이 물어보면서 장교를 비로소 피부로 느끼면서 훈련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새인가 장교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번에 다른 느낌이 든 것은 훈련내용이 이전과는 다르게 전술과목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었다. 이전 훈련들을 떠올려보면 교수법등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사실 병 기본 훈련과 별 차이가 없는 군 기본 훈련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분소대 공격, 분소대 방어, 중대 전투라는 전술 과목들을 접하면서 분대‧소대‧중대 편제와 공격‧방어의 기본 전술을 익히고 전투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훈련을 다녀와서 전쟁 영화를 몇 편 보았는데 그 전까지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쉽게 이해되면서 전술과목이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병 체험 훈련에 갔을 때, 비록 비 때문에 교육 훈련에는 참가하지 못 했지만, 실제 내무실 생활과 장교님들의 지휘,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앞으로 내가 야전에 배치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며 나의 모습을 수정해나갔다. 그리고 병 체험 훈련을 나갔던 중대의 병사들과 간부님들이 정말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어서 정말로 고마웠다. 도우미와 – 내가 갔던 중대에서는 후보생 한 명에 도우미 한 명을 붙여주어서 같이 행동하게 하였다. – 같이 근무도 서고 밥도 먹고 교육도 받아서 사병들의 생활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또 일과 후에는 간부님들이 후보생들과 차나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장교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앞으로 임관하고 나면 병사들과 내무실 생활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될텐데, 그런면에서 이런 병 체험 훈련이 비록 1주일이지만, 병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써 참 중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또 비 오는 날에도 그 비를 다 맞아 가며 소대장님과 병사들과 오랜만에 함께 축구를 실컷 뛰었다. 비록 축구 끝나고 입을 옷이 없어서 고생하긴 했지만 함께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이제 모든 입영 훈련도 끝나고 몇 달 후면 임관식이 열린다. 그때까지 열심히 장교가 될 준비를 해야겠다. 학과 공부 마무리도 잘 하고 군사학도 열심히 배우고 체력도 다지고 마음다짐도 새롭게 해서 대한민국의 장교로서 소위 계급장을 다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 하여야겠다.


 ‘황금 연못’을 읽고…

 ‘황금 연못’은 5월 중순, 메인주의 한 피서용 별장에 노부부가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9월 중순에 별장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동안, ‘황금 연못’ 별장에 지내며 거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타낸 희곡이다. 이 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노년기의 심리를 에릭슨의 심리 사회적 발달 단계에 기초하여 풀어보도록 한다.




 에릭슨 정성설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에 들어서면 자아통합과 절망의 갈등이 일어나고 이를 극복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지혜’라는 미덕이다. ‘노년기’ 이전의 7가지 단계에서 획득한 미덕 ( 희망, 의지, 목적, 유능감, 충직성, 사랑, 배려 ) 이 8번째 단계인 ‘노년기’에 들어서 ‘자아통합’이라는 방법을 통해 ‘죽음’이라는 절망을 넘어서 인간의 최종 미덕인 ‘지혜’로 거듭나게 된다. 따라서 미덕들이 절망과 갈등하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노년기의 심리를 알아보자.




 ‘노만’은 올해 황금 연못에서 80세 생일을 맞는 전직 교수이다. 그는 독설과 야구를 좋아하고 부인인 ‘에셀’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자신의 노년기를 매우 증오하고 있다. 그의 노년에 대한 증오는 고약한 농담과 삐딱한 태도로 나타나 주위 사람을 괴롭힌다. 그는 이 ‘황금 연못’에 처음 온 날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어떻게 죽으면 좋을까,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내 생에 마지막 피서라는 둥, 꼭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둔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이런 노만을 보고 부인 ‘에셀’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노만은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한다. 노만은 그런 노년기에 대한 증오 ― ‘절망’ ― 을 여러 가지로 해결해보려 애쓴다.




 노만의 부인 ‘에셀’은 원기 왕성한 69세 할머니이다. 에셀은 노만과는 달리, 노년기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자기는 중년기의 끝자락에 와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노만과 같은 절망을 느끼지 않고 활기차게 살고 있다. 딸기를 따고, 땔감을 구해오고, 맛있는 음식을 하고… 젊게 살려는 예쁘장한 할머니이다.




 1막 1장에서 노만은 전화가 잘 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전화 교환수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전화는 다른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로 이 같은 행동은 황금 연못의 이 별장이 고립 ( 성인기 발달 과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노만의 욕구 일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찰리가 올 때 마다 신문을 받아서 야구 이야기를 하며 세상과 접촉을 시도하는 것 또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1막 2장에서 노만은 신문의 구인란을 열심히 살펴본다. 에셀이 듣든 말든,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죽음에 맞서 어떤 일을 함으로써 절망을 이겨보려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는, 자신의 역할을 찾는 시도이다. 이는 ‘청소년기’의 발달 과제인 ‘정체성과 역할 혼미의 갈등’을 해결해서 ‘충직성’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노만은 에셀의 말대로 딸기를 따러가지만 빈 통을 가지고 돌아온다. 2장의 끝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노만 : 딸기밭 옆까지 갔지만 옛길이 어디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어… 어찌나 무서운지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막 뛰어 돌아온 거야, 당신한테, 당신의 예쁘장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말이야.




 노만은 늙어서 예전에 하던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열등감( 학령기 발달 과제 )에 빠져서 절망한다. 그래서 이를 이기기 위해 에셀이 있는 집으로 뛰어 돌아온다. 친밀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공간, 즉 유아기 발달 과제인 신뢰성 있는 공간으로 가면된다는 ‘희망’을 갖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에셀과의 친밀감 ( 성인기 발달 과제 )과 자신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안심한다.




 1막 1장과 2장에서 노만은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에셀인줄 모르고 에셀을 향해 손님이 왔다고 이야기한다. 이 단순히 늙어서 그렇다고 보기보다는 노만과 에셀의 관계도 어느 정도의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막 3장에서는 빌와의 대화에서




 노만 : 그래. 대화 자체가 울고 싶을 정도로 지루해서 말이야, 무심코 재미있는 일을 찾게 돼. 자기가 입을 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노만 : 에셀과 얘기할 때엔 그렇지 않아. 예쁘지, 그 할망구?


 노만 : 오랫동안 사귀어 왔지만, 아직도 그 할망구가 예뻐 보인단 말야…




 자신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단절 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에셀은 예외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는 고립되어 있지만 에셀 만큼은 ‘친밀감’이 있다는 것이다. 성인기 덕성인 ‘사랑’을 여기서 확인 할 수 있다.




 2막 1장에서 빌리와 같이 낚시도 하면서 불어도 가르쳐준다. 이는 아직도 내가 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즉 자신의 생산성 ( 중년기 발달 과제 )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행동이다.




 1막 3장과 2막 1장을 비교해보면 노만과 첼시의 부녀 관계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막 3장에서는 노만과 첼시의 관계가 부녀 관계라고 보기 어색할 만큼 껄끄럽다. 에셀과는 정말 친밀하게 지내지만 노만과는 굉장히 먼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2막 1장에서는 사뭇 관계가 새로워진다. 첼시는 아버지와 적극적인 대화로 이 거리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는 첼시의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빌과 결혼함으로써 해결된 결과이다.




 노만이 첼시에 대한 시선도 변화한다. 1막 3장에서 첼시가 황금 연못을 처음 방문할 때만 해도 뚱뚱한 꼬마라고 인식을 했지만 빌과 섹스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써 성인으로 인정을 한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빌 얘기에 딴소리를 하지만 결국 딸과의 섹스를 허락하면서 딸을 인정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 결과, 2막 2장에서




 에셀 : 난 죽음을 보고, 손으로 만지고, 두려워했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피부로 느낀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다지 싫지는 않았어요. 마음이 진정되는 듯한, 그다지 징그럽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을 듯해요.


 …


 노만 : 내년에 읽을 거야.




 노만과 에셀이 ‘절망’을 극복하고 ‘자아 통합’을 통해 ‘지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에셀은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죽음’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자, 당황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고, 노만은 계속 하던 죽음 이야기(노령기의 불만 토로)를 그치고 내년까지 살아서 다시 이 ‘황금 연못’에 오겠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동계 입영 훈련을 마치고…




6167 변증현




나는 이번 2학기 방학을 굉장히 늦게 했다. 크리스마스도 지난 12월 27일 방학을 해서 얼마 되지 않아 새해를 맞이하고 또 얼마 안 있어 세 번째로 입영 훈련을 들어갔다. 워낙에 방학을 늦게 한지라, 훈련을 별로 생각을 못했지만 방학과 훈련사이 그 짧은 시간동안 훈련을 걱정하거나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지만 훈련 들어가기 바로 이틀 전, 갑자기 훈련이 걱정되었다. 집체 교육을 받을 때도 그러하지는 않았는데… 여하튼 다음날 훈련 들어갈 준비를 하다보니 더 이상 별 부담 없이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두 번째 동계 훈련이라 지난 기초 군사 훈련을 떠올리면서 목토시, 속장갑 등 방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 하계 훈련 때 필요하다고 느꼈던 물품들 까지 꼼꼼히 챙겨서 들어갔다.


학군교에 들어오니, 3학년들은 구막사를 쓰게 된 것을 알았다. 내무실에 와보니 관물 정리를 하는데 옷을 모두 접어서 보관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불편했다. 세면장이 밖에 있긴 하지만 자리가 신막사보다 많아서 괜찮았다. 빨래도 가까이(복도) 널 수 있다는 것이 편리했다. 25년 된 이 구막사를 우리가 마지막으로 쓰는 것이었다.


입소식을 치룬 첫날, 우리 9중대는 교육 없이 개인 정비 시간이 주어졌다. 교육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독도법으로 시작되었다. 이론 교육 8시간은 졸립기도 했지만 그후 이틀간 이루어진 실습 교육은 흥미로웠다. 특히 하루 종일 표적을 찾아 헤매던 마지막 날이 가장 재미있었다. 야간까지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나침반과 지도만으로 표적을 찾는 것이 재미있어서 훈련 끝나고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까지 했었다. 다음 과목은 교수법이었다. 8시간 이론 교육을 받고 12시간동안 육성 지휘를 실습했다. 목청이 맘껏 트이지가 않아 애를 먹었다. 긴장해서 틀리기도 했었다. 그 다음 과목은 K201 유탄 발사기였다. 영화나 게임에서만 보던 유탄 발사기를 직접 분해조립을 하니 신기했다. 비록 목표물은 맞추지 못했지만 인상 깊은 수업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수. 나는 하계 훈련 때에도 유격으로 끝나서 목이 망가진 상태로 퇴소했는데 이번 동계 훈련도 공수로 끝나서 2번 훈련 연속 가장 힘든 과목을 맨 마지막에 치루고 종합고사를 치뤘다. 첫날 모형탑에서 뛰어 내릴 때, 방탄모의 똑딱단추가 떨어져서 방탄모를 떨어트렸었다. 다음날 반창고로 똑딱단추를 동여매고, 붕대를 새로 감아서 준비한 결과 두 번째 강하는 잘 됐다. 그런데 교관님이 전날보다 많이 나아졌다면서 한 번 더 타게 하셨다. 그렇게 해서 혼자 두 번을 뛰어내리고 점심을 먹고 종합고사를 보았다. 틈틈이 자율학습시간마다 공부를 해서 무사히 시험 볼 수 있었다.


다음날 퇴소식을 치루고 학군교로 돌아와 퇴소 신고식을 하고 관물 정돈을 하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별로 춥지를 않아 내복을 거의 입지 않고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눈도 이틀짼가에 잠깐 살짝 내려서 가뿐하게 치웠다. 덕분에 훈련은 잘 받았지만 ‘혹한기’ 훈련은 못받았다. 어쩌면 지난 겨울, 기초 군사 훈련을 강추위와 폭설 속에서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겨울에 혹한기 훈련은 다 받은 것이 아닐까?


내무실 동기들이 모두 다 착하고 재미있어서 즐거웠다. 지난 하계 때는 경상도 애들이 많았는데 이번엔 전라도 친구들이 많았다.  이렇게 훈련 들어갈 때마다 팔도 친구들과 사귀게 되는 것이 우리 ROTC입영훈련의 또 다른 맛인 것 같다.

 

후보생 1년을 마치며…




6167 변증현






 기초 군사 훈련으로 시작된 후보생 1년차 생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해주었다. 기초 군사 훈련 때, 20년만의 혹한 속에서도 땀흘려가며 기본 제식을 익히고 사격을 하고, 총검술을 배워나갔다. 자다가 추워서 깨기도 하고, 꽁꽁 얼은 손으로 속옷을 손빨래를 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후보생 생활은 시작되었다.




 봄이 오고, 입단식과 개강식을 치룬 우리들은 3월 한달 동안 단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선배, 동기의 얼굴을 익히고 단복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한다는 것도 처음엔 너무도 힘들었다. 처음엔 경례하는 것조차도 왜이리 어색했던지…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훈육관님들의 지도와 선배님들의 교육 속에서 우리는 민간인에서 후보생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새벽엔 태권도와 체력단련으로 전투력을 유지하고 오후엔 군사학으로 군사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교내 환경 정화 활동’이나 ‘장애인 동반 나들이 활동’ 같은 뜻 깊은 봉사활동도 내 후보생 생활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후보생들의 최대 축제인 무호제를 맞이하였다. 무호제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무호제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난 뒤에는 준비하는 동안 흘려왔던 땀방울이 시원한 청량제가 되어 내 머리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 참배를 가서 선배 장군님이신 이영대 장군님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왔다. 그렇게 후보생의 첫 학기가 지나갔다.




 우리 학교는 하계훈련을 2차로 들어가게 되었다. 1차로 다녀온 4명의 동기가 부럽기도 했지만 우리는 군장 검사를 하고 친구, 가족들에게 잠시동안의 작별을 고하고 학군교로 향했다. 우리 중대는 각개전투, 화생방으로 시작해서 유격, 행군으로 모든 훈련이 끝났다. 위장한 채로 CS복을 입고 비온 뒤 흙탕물에서 뒹구는 것으로 하계 훈련 첫날이 지나갔다. 훈련 초기에는 비가 계속 오고 개지를 않아서 빨래가 큰 걱정이었다. 나중에 화생방 훈련받을 때는 땡볕에서 고생했지만. 유격과 행군으로 지친 몸을 가지고도 우리는 다음날 체육 대회 때 쉴 대로 쉰 목을 가지고 목청껏 응원을 했다. 축구를 결승까지 가서 탈락한 것이 가장 안타깝고 분했다. 밤에 후보생들 장기자랑을 보면서 하나되는 ROTC의 모습을 보면서 후보생 기간의 하이라이트인 나의 3학년 하계훈련은 끝이 났다.




 2학기가 시작하고, 우리는 3년만에 열리는 연∙고 ROTC 체육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필승, 전승, 압승의 의지로 우리 후보생들은 정말 열심히 연습, 아니 훈련을 했다. 결과는 헛되지 않아서, 자유투 게임이었던 농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했다. 그날 오후에 먹던 도시락은 왜 그리도 맛있던지… 2학기에도 봉사활동은 계속되었다. 후보생들의 대부분이 헌혈 행사에 참여하여 사랑을 나누었고 장애인 동반 등반 대회도 뜻 깊은 행사였다. 대부분의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끝난 지금. 우리는 한달 남짓 2학기 후보생 생활을 남겨 놓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참 하나하나 아쉬울 것 없는, 알찬 시간들로 나의 후보생 1년이 채워진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장애인 동반 나들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봉사 활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며 아름답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나 홀로 뛰어들기엔 부담이 커서 ‘나중에 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다. 봉사활동을 할 만한 기회나 계기가 나에게는 별로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몇 번 하던 헌혈도 대학 와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하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주어졌다. 5월 12일 성북 구청에서 주최하는 장애인 바깥 나들이 행사에 우리 102 학군단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성북 구청 앞에서 모여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차에 올라타고 처음 장애인 분들을 만났다. 선생님들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고 차는 출발했다. 과천까지 가는 동안 장애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굉장히 수줍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착해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많은 분들이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화장실은 2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아서 많이 불편했다. 입장을 해서 나는 내 파트너(정신 지체)와 함께 놀이 기구를 타며 놀았다. 나도 오랜만에 타보는 놀이 기구라서 즐거웠지만 내 파트너는 놀이 기구를 타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어 했다. 우리는 손을 꼬옥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약속 장소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모인 것을 확인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잔디밭으로 향했다. 그곳엔 점심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내 파트너 짐심까지 타와서 같이 먹었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위한다는 것. 어쩌면 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소중한 경험인 것 같다. 이래서 봉사활동이 힘들고도 보람찬 것인 가… 하는 생각도 했다. 뒷정리도 깨끗이 하고 이번엔 동물원으로 향했다. 나는 동물원에도 오랜만에 오는 거라서 구경을 열심히 했지만 내 파트너는 아쉽게도 동물을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간 날이 오랜만에 화창하게 맑을 날이어서 바깥 나들이하기에는 좋았지만 걷기도 많이 하고 해서 조금 더웠다. 나와 내 파트너는 음료수를 사먹었다. 내 파트너는 선생님과 친구들 것까지 챙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돌고래 쇼를 재밌게 보았다. 특히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돌고래 쇼였다. 쇼가 끝나고 돌아올 때에 장애인들을 부축하는 우리 후보생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장애인분들은 이별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고, 그렇게 우리는 짧은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단 하루 동반 나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 내가 제대로 해보는 첫 봉사 활동으로 봉사 활동의 의의를 느낄 수 있었고, 둘째로 장애인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하면서 장애인분들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할 수 있었고, 셋째로 봉사 활동을 하면서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의 계기도 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말 뜻 깊은 하루였다. 이런 기회를 주신 단장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런 행사가 종종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현장확인, 겸재정선의 300년전 한강’을 보고…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정선은 그의 작품집 정교명승첩 32개의 그림 중에 20개는 한강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 이전 시기 화가들이 중국의 산수를 그리는 관념 산수화를 주로 그리는데 비해, 겸재는 한강, 금강산 등 우리나라의 풍경을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를 그려냈다. 녹운단에서 시작해서 낙전정까지, 겸재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한강의 모습을 우리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진경산수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 산천을 그린 이 진경산수화는 18세기에 나타났다. 후금이 명을 누르고 청을 건국하면서 우리 조선은 명 대신 성리학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진경 문화를 꽃 피웠다. 정조시대에 그 꽃을 피우는 진경문화는 사상, 문학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이 훌륭한 문화를 우리 후손들이 바르게 이어 받지 못하고 어느새 이젠 중국이 아닌 서양의 나라들을 흉내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강의 아름다운 풍경, 특히 양천은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올 때 ‘양천을 못 봤다면 조선을 구경한 것이라 말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지니고 있었으나 무분별한 개발로 그 빼어난 풍광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이는 양천뿐 아니라 한강줄기 따라 늘어섰던 수많은 정자들, 기와별장들도 이제는 위치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대신 시멘트로 만들어진 회색 건물들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앞으로 분별없는 계획으로 훌륭한 문화적 자산을 없애버리는 시대적 착오는 없어야 한다. 오히려 그것들을 잘 보존해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관광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진경 문화.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때가 아니었나한다. 우리도 원숭이 흉내내듯 다른 나라 따라가기에 급급하지 말고, 우리 나름대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독특하고 고유한 ‘우리’의 문화를 꽃피우는, 제2의 진경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안동 하회 마을을 다녀와서


6167 변증현




2000년 5월. 왠지 학교 생활이 지루하고, 놀던 것도 싫증났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 녀석 둘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때마침 학교 축제기간이라 수업도 걱정이 안됐다. 그저 서울을 떠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목적지는 청량리역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날짜와 시간, 준비물, 돈만 결정해서 모였다. 갈만한 데를 찾아봤지만 청량리역은 대부분 강원도 춘천행 열차였다. 청평, 가평, 강촌 M.T촌은 지겨운지라, 다른 도(道)행을 찾아 봤더니 ‘안동’행이 시간과 표 값이 적당하다 싶어서 안동으로 가기로 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도시 한가운데라, 서울을 떠나온 보람이 없었다. 이미 해는 져서 이동하기도 힘들 것 같아 굶주린 배를 채우고 여관을 잡았다. 생각보다는 싸게 잡았다. 여관에 들어와 보니 또 마땅히 할 게 없어, 밖으로 나갔다. 노래방에서 소리 좀 지르다가 게임방에서 게임도 좀 했다. 시세는 서울과 똑같았다. ‘비싸게 여관을 잡지 말고 게임방에서 밤을 샐 걸…’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술과 안주를 사 가지고 들어가 간단히 한 잔씩하고 다음 날을 위해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 즈음, 우리는 깨었다. 여관을 나와 갈 곳을 생각해보니 ‘안동’하면 ‘하회마을’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회마을’에 가기로 했다. 교통 수단은? 당연히 도보였다. 시간도 많겠다, ‘안동 하회 마을’ 이니 그다지 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회마을 가는 길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산업용 도로인지 널다랗게 뚫린 길에는 트럭이 옆으로 쉥~쉥~ 지나갔다. 때는 5월. 날이 점점 더워지는 때인지라 아스팔트 길은 마치 초여름처럼 더웠다. 우리는 물에 준비한 소금까지 타 마셔가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내 발이 고장 나고야 말았다. 물집이 잡힌 것이었다. 다행이 손님이 없는 병원이 길가에 있어서 마음씨 좋은 아저씨에게 공짜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도 채우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다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안동 과학 기술 대학(?)인가도 지나쳐왔다. 도무지 금방 나올 것만 같은 하회마을은 절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늦게 출발한 터라, 입장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우리는 도보로 간다는 계획을 수정하여, 트럭을 얻어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 다음에 버스를 타고 하회마을을 향했다. 그러나 이미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고 있었으니…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하회마을 조금 앞에서 내려 하회마을을 휘돌아 가는 강물에 돌을 던지고 놀다가 ‘헛제사밥’이라는 먹거리도 먹어보고 숙소를 잡았다. 밤바람이나 쐴 겸 나와보니 ‘장승 마을’(?)인가하는 것이 있어서 장승 구경도하고 널도 뛰어보고 놀다가 숙소로 돌아와 ‘안동 소주’를 ‘감자전’과 ‘고기 산적’을 안주 삼아 깨끗하게 비우고 피곤한 하루를 마쳤다.




마지막 날, 약간 느지막히 일어나 하회마을 구경에 나섰다. 여기저기서 사진도 찍고… 출출해서 육개장도 사먹고… 구수한 인심이 젊은 나그네들을 반겼다.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하고… 마침 그 즈음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1주년인가로 전시 같은 것을 많이 했다.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기차역으로 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했다.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를 읽고…


고등학교 때 국어 공부를 하면서 김수영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왠지 그 시들이 맘에 들어 태어나 처음으로 시집을 사서 읽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들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몇몇 고등학교 참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풀>, <폭포>, <눈>, <푸른 하늘을> 등의 시를 제외하고는, 아직 시적 감각이 없는지, 몇 번을 읽어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알고 있는 만큼, 느낀 만큼만 어렴풋이 이야기하자면, 먼저 그의 으뜸 가는 주제는 ‘자유’이다. ‘자유’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그리고 억압받는 ‘자유’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작가 자신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특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한다.(<강가에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렇게 자조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미 유명해진 <풀>, <눈>, <폭포>, <푸른 하늘을> 같은 시에서는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 그는 모더니즘 시인이다. 모더니즘은 <봉건적 요소>와 <감상주의>에서 탈피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따라서 비시적(非詩的)요소와 현대문명을 과감하게 도입한다. 이러한 모더니즘 요소가 그의 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시집의 제목으로 나온 ‘거대한 뿌리’라는 시를 살펴보면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이후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시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아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연은 전혀 이해가 안가지만, 작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보이고 나아가 ‘거대한 뿌리’ 라고 표현하고 있는 조국에 애정이 깊은 것 같다. 이념, 겉치레, 껍데기, 불행한 역사의 유물, 외세를 배격하고 전통과 사회적 약자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단정적이 어조를 씀으로써 담담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시는 가슴으로 느껴야한다는데 이해를 못하니까 음미할 수가 없었다. 시를 즐기고는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할지… 시를 이해할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어려운 시집을 고른 것일까?


<풀>, <눈>, <폭포>, <푸른 하늘을>에 담겨진 작가의 역사의식이 좋아서 김수영 시집을 구입하였지만 그밖에는 마음에 드는 시를 찾지 못했다. 역시 너무 어려워서 인가? 아무래도 다독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향    수




정 지 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 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밤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나는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만 자라서 이 시에서와 같은 고향 – 향수 – 가 없다. 그래서 이 시에 나온 풍경들, 평화롭고 단란한 농촌의 모습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너무나 평화롭고 한적하고 조용하고 정직해 보이는 농촌 생활이 바쁘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경쟁적인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겐 영원한 휴식처- 그 이름하여 고향 -이다. 때론 나도 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소박하게 사는 꿈을 꾸어 본다.

그 날이 오면

심   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2연 밖에 안 되는 심훈의 시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물론 이 시 말고도 아름다운 시, 감동적인 시들이 많지만 처음 읽는 순간, 가슴속에 절절히 스며드는 시는 이 시밖에는 없었다. 분량도 짧지만 내용도 간단하다. 필자는 ‘그 날’이 오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그냥 소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죽도록’ 바라고 있다.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필자는 얼마든지 죽어도 좋다. 종로의 인경을 머리가 깨지도록 들이받아 울려도, 가죽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도, ‘그 날’. ‘그 날’이 오기만 하량이면 기뻐서, 여한 없이 눈을 감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날’에 대한 염원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치열하다 못해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일신의 생사는 돌보지 않는 염원… 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벅찬 감동을 느끼도록 만든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일신의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전태일이 생각났다. 필자의 ‘그 날’은 조국 광복이었겠지만, 전태일의 ‘그 날’은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우리 겨레의 ‘그 날’은 아마도 조국통일의 ‘그 날’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들은 모두 남북분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세기 동안, 금수강산이 허리가 잘린 채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신음하여 왔는가? 통일의 ‘그 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점



근래에 들어서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세계화 열풍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과거 대부분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활동이 한 국가 내에서 이루어진 반면, 현대 사회는 거의 모든 활동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만큼, 외국인들과의 언어 소통이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외국인 중에 많은 수가 로마자를 쓰는 아메리카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그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한글과 그들이 쓰는 로마자를 연결해 주는 규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과거 문교부에서 84년, 86년에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각각 새로 제정,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에는 문제가 있다.




현재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은 ‘되도록 현지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경우,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푸슈킨’이 옳으나, 몇몇 출판사들은 현지음과는 거리가 있다며 ‘뿌쉬낀’을 고집하고 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고 제4항에 명시 되어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뿌쉬킨’이 아니라 ‘푸슈킨’이여야 하지만, ‘되도록 현지어 발음에 가깝게’ 라는 대원칙에 맞게 표현하려면 ‘뿌쉬킨’이여야 한다. 이것은 외래어 표기법 내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


브라질 화폐 단위인 ‘Real’도 같은 경우이다. 옛 스페인의 화폐단위에서 생겨난 이 말은 포르투갈어를 자국어로 쓰고 있는 브라질 현지 발음으로는 ‘헤알’과 비슷하지만 국립 국어 연구원이 발간한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 따르면 ‘레알’로 표기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또 지난 97년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마련한 표기법도 ‘레알’로 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원래 포르투갈어에서 단어 첫머리에 오는 ‘r’은 우리말 발음의 ‘ㅎ’에 가깝게 소리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축구 선수 ‘Ronaldo’를 ‘호나우도’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Real’은 ‘레알’이고 ‘Ronaldo’는 ‘호나우도’인가? 그것은 ‘Real’의 경우에는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레알’로 승인했기 때문이고 ‘Ronaldo’와 같은 사람이름의 경우엔 일일이 규정을 만들 수 없어 현지 발음에 충실하게 표기한다는 원칙에 의해 ‘호나우도’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의 통화 단위인 ‘위안’도 현지에서는 ‘위앤’으로 발음하고 있어서 표기와 발음간의 차이가 있다.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영어 단어들도 현지 발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라디오, 비아그라도 현지인들은 래디오, 바이애그라로 발음하고 있다. 이는 심의위에서 발음보다는 영어 스펠링을 기준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 말에는 /f/와 /v/, /θ/ 발음이 없고, /r/과 /l/이 구분이 힘들기 때문에 File과 Pile을 똑같이 ‘파일’이라고 발음하고, Fax와 Pax를 똑같이 ‘팩스’라고 발음한다. 또, Bolt와 Volt, Right와 Light는 각기 ‘볼트’, ‘라이트’로 밖에 쓸 수 없어 대화할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택동을 ‘마오쩌둥’으로도 쓰고 있고, 손문을 ‘쑨원’으로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된소리를 쓰지 않도록 규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순경음 ㅍ’(/f/)과 ‘순경음 ㅂ’(/v/), /θ/, /r/ 등을 표시할 새로운 문자를 도입하는 것도 정확한 음가 표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외래어 표기법의 취지가 외래어를 한글로 충실하게 표현하자고 제정된 것이므로 현지 발음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국립 국어 연구원과 외래어 심의 위원회는 외래어 사용이 빈번해지는 세계화 시대라는 점을 의식해 이러한 실제 발음과 표기상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확한 표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며, 너무 현실에 얽매여 낡은 외래어 표기법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말고 혼란이 예상되더라도 필요에 따라 개정을 함으로써 국민들의 언어 생활에 혼란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남의 말을 한글로 표시하는 외래어 표기법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말을 로마자로 나타날 때 쓰는 로마자 표기법에도 고쳐져야 할 점이 있다. 현재 전국 도로 표지판과 지하철 안내판에 모음 앞에서의 여린소리/ㄱ, ㄷ, ㅂ, ㅈ/은 /k, t, p, ch/로 표기되어 있다. /k, t, p, ch/의 발음이 /ㄱ, ㄷ, ㅂ, ㅈ/인가? 영어에서 /k, t, p, ch/는 거센소리/ㅋ, ㅌ, ㅍ, ㅊ/로 소리 난다. 따라서 영어 교육을 받아 온 대부분의 한국인으로서는 /k, t, p, ch/를 /ㅋ, ㅌ, ㅍ, ㅊ/로 밖에 읽을 수 없다. /k, t, p, ch/가 /ㄱ, ㄷ, ㅂ, 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ㅋ, ㅌ, ㅍ, ㅊ/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k’, t’, p’, ch’/가 그 답이다. /k, t, p, ch/에다가 ‘ ’ ’(어깨점)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로마자 표기법 제8항에 의하면 “인쇄나 타자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의미의 혼동을 초래하지 않을 경우 ŏ, ŭ, yŏ, ŭi 등의 ‘ ˘ ’(반달표)와 /k’, t’, p’, ch’/ 들의 ‘ ’ ’(어깨점)을 생략할 수 있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 ’ ’(어깨점)이 없어도 발음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하므로 (ex: t’al, tal 둘 다 ‘탈’로 읽을 수 있다.) ‘ ’ ’(어깨점)을 생략한다. 그러면 ‘공’도 ‘kong’이고 ‘콩’도 ‘kong’이다. ‘달’도 ‘tal’이고, ‘탈’도 ‘tal’이 된다. ‘발, 팔’ 모두 ‘pal’이고, ‘장녀’와 ‘창녀’의 구분도 사라진다. /k’, k/는 각각 /ㅋ, ㄱ/인데 ‘ ’ ’(어깨점)이 빠지면 어떻게 의미의 혼동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tch/를 ‘ㅉ’로 읽을 사람이 우리 나라에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일반 국민들은 /ㄷ, ㄸ, ㅌ/을 /d, dd, t/로 알고 있는데 반해, 로마자 표기법은 /t, tt, t’/로 정해져 있어 같은 단어 ‘tal’을 두고 ‘동상이몽’이 되기 일쑤이다.


모음의 경우에도 ‘ ˘ ’(반달표)의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기 때문에 /ŏ, ŭ, yŏ, ŭi/ 등의 발음을 올바로 실행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인이 우리 나라에 들려서 신천(Shinch’ŏn)에 가려고 하는데 신촌(Shinch’on) 표시판을 보고 내릴 수도 있지 않은가? 모음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는 /ㅓ/와 /ㅡ/의 표현인데, 이 글자들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글자이면서 독특한 소리를 나타내므로 어떤 약속기호를 잘 정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 처음 규정인 ‘조선어음 로마자 표기법’(1940)에서 /ㅓ/소리는 eo로, /ㅡ/소리는 eu로 약속기호가 정해져 벌써 60년 가까이 알려져 있으니 이를 따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물론 eo도 /ㅓ/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o는 /ㅗ/, u는 /ㅜ/를 표현하는데 주를 두고 있고, ŏ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낮고 인쇄상의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굳이 고집할 근거가 없을 것 같고 eo를 /ㅓ/ 발음으로 약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은 /eo, o, u, ŏ/ 그 어느 그 어느 것도 /ㅓ/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다른 나라에 없는 발음이므로) eu(/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u, u, ŭ/ 모두 /ㅡ/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므로 혼동을 피할 수 있는 eu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1999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되어 이런 문제들을 많이 해결하였다. 모음 앞에서의 /ㄱ, ㄷ, ㅂ, ㅈ/는 각각 /g, d, b, j/로 개정되었다. /ㅓ, ㅡ/는 /eo, eu/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파열음에서 경음이 바뀌지 않은 것은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딸기를 ‘ddalgi’로 쓰고 있는데 말이다.


이 개정안이 실행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할 것 같다. 많은 지방 자치 단체들이 이 개정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까지 써온 로마자 표기를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표지판, 터미널 등 많은 교체비용이 들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욱 반대가 심한 것은 통신업체들이다. 인터넷상에서 웹사이트 주소는 업체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하루아침에 고생해서 확보해


놓은 웹사이트 주소가 무용지물이 되니 그들의 반대는 심할 수밖에 없다. 또 김치,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 (1999)


자     음































































































한글


로마자


종전


현행



a


a



ŏ


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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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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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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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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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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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


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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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e



we


we



ŭi


ui


        모      음























































































한글


로마자


종전


현행



k/g


g/k



kk


kk



k’


k



t/d


d/t



tt


tt



t’


t



p/b


b/p



pp


p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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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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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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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ss



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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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ero/ng


zero/ng



n


n



m


m



r/l


r/l


     (※ 자음에서 ‘ / ’ 앞은 모음 앞일 때, ‘ / ’ 뒤는 그밖에 경우)




불고기, 갈비 등 우리 나라의 전통 음식 이름도 수출과 관련해 혼란에 빠졌다. 김치의 경우, 지금까지 kimchi라는 이름으로 수출해 왔는데, 개정안에 따라 gimchi로


바뀌면 수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김치, 부산, 김포공항 등, 모두 바꿔야 하지만 거센 반발에 주춤하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 전(2000년) 종로3가에서 안내판을 새로 가는 공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새 로마자 표기법 때문에 바꾸나 했더니 로마자 표기가 종전과 다름없는 Chongno- sam(3)-ga였다. Jongno-sam(3)-ga를 기대했던 나는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어렵더라도 국립 국어 연구원에서 큰 마음 먹고 개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주어야 한다. 물론 당장 교체 비용과 손실이 예상되나 잘못된 것은 고쳐져야 할 것이 아닌가? 중국의 수도 Beijing도 과거에는 Peijing이였다고 한다. 어차피 우리말을 로마자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현실 생활에 알맞게 표기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이번 개정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이번 로마자 표기법을 널리 시행해서 더 이상 언어 생활에 혼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 태 일  평 전  조영래 지음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 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스로 몸을 불사른 청년. 22살의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젊은이. 그는 왜 죽어야만 했던가?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쳤는가? 이런 질문을 풀려면 우리는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이 활동했던 시대는 1960년대 말과 1970년 까지이다. 이 시대는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운동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시대로써, 우리 나라의 모든 산업이 발달해 나가던 때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농지는 공장이 되고, 새로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고, 전태일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은 약속된 땅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도 거의 실업자로 지냈고, 어머니는 식모살이, 날품팔이로 겨우 겨우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독한 가난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일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학교 공부도 그만두고, 공장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간 곳이 평화 시장 옷 공장이었다. 태일은 그 곳에서 노동 지옥을 목격하게 된다.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1평에 4명이 일해야하는 좁은 작업장,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일당, 어두운 조명, 엄청난 먼지, 화학 약품 냄새, 허리를 필 수 없는 다락방, 2천명이 함께 쓰는 3개의 변소. 이러한 작업 환경으로 말미암아 5년 정도 평화 시장에서 일하고 나면 영양 실조와 소화불량,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류머티즘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이건 품팔이가 아니라 피팔이였다.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노동 지옥을 보면서 태일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런 법이 있다는 얘길 들은 태일은 없는 돈에 근로기준법 책을 사서 그 어려운 법률 책을 독파해 나갔다. 그 때부터 외롭고 처절한 태일의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고 정부 당국에 이러한 실상을 고발하고 사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토록 믿었던 근로 감독관과 노동청에게 실망한 태일은 이러한 활동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맘을 먹고 다시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태일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투쟁. 또 투쟁. 그러나 사회라는 벽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미 생명까지 바치기로 맘먹은 태일은 이 두껍고도 두꺼운 사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1970년 11월 13일 2시경,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태일은 길거리로 뛰어들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말라!’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고 숯덩이가 되어가는 태일을 구하러 온 친구들에게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지막 구호를 외치고 10시경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죽어 가는 작은 생명들에 대한 사랑, 사회라는 거대 조직에 대항할 수 있었던 그 용기,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지탱해준 의지. 이것들이야말로 청년 열사 전태일의 정수였다.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에게 평화 시장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노동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것이다. 그 이후로 노동운동은 계속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태일. 22살의 그 젊디 젊은 나이에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 그는 영원히 한국 노동운동의 지표가 될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를 읽고…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접했다. 그리고 몇몇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책을 구해서 읽었는데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모두 접하니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영화를 볼 때는, 부담이 없고 줄거리 이해가 쉽고 구체적인 시각적 장면을 제시해주어서 기억하기 쉬웠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은 놓치기가 쉽고 시각적 장면이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책이 보충해 주는 것 같다. 비록 영화가 소설이 되거나 소설이 영화화 될 때, 각색된 부분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으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본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경우, 소설을 영화화한 경우인데, 소설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원작에 없는 부분(문방구 날리기 등)을 첨가하고 미장셴을 깔끔하게 해서 완성도를 높인 것 같다. 그리고 원작보다 감동을 더욱 불러 일으킬만한 구성으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접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원작보다는 영화를 권하고 싶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1959년, 미국 동부의 웰튼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키팅이라는 새 국어 선생님이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웰튼 아카데미 고등학교는 사립 대학 진학 예비교로써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고 우수한 졸업생들을 많이 배출한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이다. 명문 고등학교인 만큼, 학생들 또한 ‘귀한 집 도련님’들이다. 이 도련님들은 품위를 지키며, 너무도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감정을 절제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비틀즈 혁명’이전으로써 학생들은 그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아버지나 선생님 등,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기성세대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엔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곧 ‘불량아’로 찍히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은 그저 아버지가 짜놓은 인생 계획표대로 살아가야만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러한 특수한 환경, 특수한 상황 속에서, 소년들이 한 사람의 이상적인 교사, 존 키팅을 만남으로써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 자신의 시로 표현하는 기쁨에 눈 떠가는 성장의 이야기이다. 존 키팅은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숨막힐 것 같은 교칙,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주위의 과잉기대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 ‘생의 정수’를 즐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또 시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며 진정으로 음미하는 황홀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학생들을 그러한 자유에로의 항로로 항해하게 하는 선장임을 자처한다.


학생들은 이 정열적인 선생을 만남으로써 그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황홀한 자유에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간다. 그러한 접근 과정에서 그들은 당황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회원들은 밤에 학교를 나가 동굴에서 자기가 쓴, 자기의 주장이 들어간 자신의 시를 자기의 목소리로 낭송하고 음미한다. 그러면서 자기표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반항은 꿈도 못 꾸던 우등생인 닐 페리가 아버지가 반대하는 연극을 하고, 찰리 달튼은 학교에 남녀공학을 하자는 글을 쓰고, 녹스 오버스트릿은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러한 자유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보수적 상황에서 키팅은 너무도 급진적인 자유를 내세웠다. 결국 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은 학교라는 억압체제에 짓눌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연극을 한 닐 페리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고 키팅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나머지 학생들은 굴욕적인 서명을 강요받는다. 자유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만큼, 학교로의 전향은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키팅을 배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 할 수가 없다. 누구보다도 여성스럽고 심약하던 토드 앤더슨이 용감하게 교장 선생님 앞에서 존 키팅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해 책상위로 올라서는 그 장면에는 사라져 가는 선장에 대한 아쉬움과 존경, 전향에 대한 사죄, 그리고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굳건한 모습에 우리는 감동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토드 앤더슨이다. 토드는 입학할 때부터 그 학교 우수 졸업생인 형의 영향으로 너무도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형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심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키팅 선생님을 만나, 시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책상에 오르고 하는 사이에 마지막 ‘죽은 시인들의 사회’모임에서는 멋진 시를 낭독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토드 앤더슨이야말로 키팅 선생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성격 변화가 가장 심했기 때문에, 토드 앤더슨의 변화를 보면 키팅 선생님의 교육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자유에의 동경은, 특수한 환경, 특수한 시대를 뛰어 넘어, 일반성을 갖는다. 자유가 억압되는 곳은 어느 환경,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고등학생 이야기 일 수도 있다. 또, 바로 우리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기라.), ‘생의 정수를 즐기라’ 는 키팅의 이야기는 결코 헛된 이야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도 시를 가슴으로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영어 교육의 문제점과 대책




우리 나라 학생들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6년 내지는 10년 동안 영어 교육을 받는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한 과목을 배운다면, 그 과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영어 교육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의 대화를 매우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TV 프로에서는 외국인을 시켜서 학생들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그 프로에 나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창하게 아니, 유창하지 않더라도 마음껏 대화를 나눈 학생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영어 실력을 검사하는 시험인 TOEFL 이나 TOEIC 점수를 볼 때, 우리 나라 학생들의 성적은 매우 낮은 순위에 올라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지금의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은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과연 지금의 영어 교육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또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 나라 영어 교육에 첫 번째 문제점은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시 전쟁이란 말로 대변되는 대학 입학 경쟁이 지금의 교육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우리 나라만의 특수성의 영향으로, 영어 교육이 외국어 능력을 학생들에게 함양시켜서 국제화,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대학 입시를 위한, 점수를 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인식되고 있지 않는 것에 현재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근시안적인 영어 교육으로 말미암아 영어를 10년이나 배우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대학생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Reading, Listening 위주의 해석 영어이다. 해석 영어는 말 그대로 남의 이야기를 읽고, 또는 듣고 그 뜻을 이해하는 ‘해석’ 위주의 영어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Speaking, Writing 위주의 작문 영어이다. 작문 영어도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을 하거나 씀으로써 남에게 정확하게 전달시키는 ‘작문’ 위주의 영어이다.


해석 영어와 작문 영어, 이 두 가지 영어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두 명이 대화를 한다고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문 영어를 하는 것이고 듣는 사람은 해석 영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책이 있다고 할 때, 책을 쓴 사람은 작문 영어를 한 것이고 읽는 사람은 해석 영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문 영어와 해석영어는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영어에 모두 능통해야만 ‘영어에 유창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은 해석 영어만을 강요한다. 우리 나라의 비정상적인 영어 교육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이다 보니 평가가 아무래도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해석 영어는 글을 주거나 또는 대화를 듣게 해서 올바로 이해했는지, 아닌 지만을 확인하면 평가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현재 대부분의 영어 시험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작문 영어는 뚜렷한 평가 기준을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평가의 객관성이 보장되지를 않는다. 평가 기준이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작문 영어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채점하기가 매우 어렵다. 수능에도 말하기 문항이 있기는 하지만 객관식이기 때문에 작문 실력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한 교사가 현재 50여명의 학생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작문 영어 교육에서는 필수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따라서 작문 영어 실력이 늘어날 기회가 없다. 대신, 단순 주입식의 해석 영어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해석 영어는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앞에 나가서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석 영어와 작문 영어 사이에 불균형이 초래되고 마침내는 들을 수만 있고 말 할 수는 없는 벙어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해석 영어를 열심히 해서 많은 단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단어들을 쓸 줄을 몰라서 허둥대는 것이 대부분의 요즘 학생들이다.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일관된 교육 정책의 부재(不在)에 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고, 이번에는 저렇게 해보고 하는 식으로 정책이 왔다 갔다 하니 학생들은 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힘들어 진다. 이번에 실시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좋은 예이다. 사전에 충분한 의견 수렴도 하지 않은 채, 교육부 멋대로 실시하였고 실시하더라도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을 교사도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제멋대로 강행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은 많은 폐단을 낳았다. 우선 교사가 준비되어 있지가 않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거의가 30대 이후 여 선생님들인데 몇 년간 안 하던 영어가 방학 때 연수 조금 받는다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가 있는가? 영어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나이를 많이 드신 교사들인데… 그런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학생은 영어 공부가 제대로 되겠는가? 오히려 흥미 감소라는 부작용만을 낳을 뿐이다. 결국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들은 학생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서투른 정책 결정과 성급한 시행이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우리 나라에 잘못된 영어 교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선, 반 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 현재 한 선생님이 50명을 데리고서는 영어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과목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특히 작문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학생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며 잘못된 영어를 바로잡아 줄 수 있도록 한 반의 인원이 더더욱 줄어야 할 것이다. 또, 교사들의 실력을 향상 시켜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해석 영어만이 아니라 작문 영어까지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앞으로의 수업 방식도 달라 져야 할 것이다. 단순 주입식이 아닌 토론, 대화식 수업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리고 무분별한 Native Speaker의 교습은 피해야 할 것이다. 들이는 외화에 비해서 별로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발음 교정 등 꼭 필요할 때만 교습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교육부의 일관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정책 결정 과정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고도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1세기가 몇 해 안 남아 있다. 앞으로 올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다. 그 정보화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우리는 외국어, 특히 영어 능력의 함양이 필요하다. 교육부가 이 점을 명심하고 올바른 정책을 수행할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