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이 오면

심   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2연 밖에 안 되는 심훈의 시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물론 이 시 말고도 아름다운 시, 감동적인 시들이 많지만 처음 읽는 순간, 가슴속에 절절히 스며드는 시는 이 시밖에는 없었다. 분량도 짧지만 내용도 간단하다. 필자는 ‘그 날’이 오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그냥 소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죽도록’ 바라고 있다.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필자는 얼마든지 죽어도 좋다. 종로의 인경을 머리가 깨지도록 들이받아 울려도, 가죽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도, ‘그 날’. ‘그 날’이 오기만 하량이면 기뻐서, 여한 없이 눈을 감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날’에 대한 염원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치열하다 못해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일신의 생사는 돌보지 않는 염원… 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벅찬 감동을 느끼도록 만든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일신의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전태일이 생각났다. 필자의 ‘그 날’은 조국 광복이었겠지만, 전태일의 ‘그 날’은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우리 겨레의 ‘그 날’은 아마도 조국통일의 ‘그 날’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들은 모두 남북분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세기 동안, 금수강산이 허리가 잘린 채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신음하여 왔는가? 통일의 ‘그 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점



근래에 들어서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세계화 열풍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과거 대부분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활동이 한 국가 내에서 이루어진 반면, 현대 사회는 거의 모든 활동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만큼, 외국인들과의 언어 소통이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외국인 중에 많은 수가 로마자를 쓰는 아메리카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그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한글과 그들이 쓰는 로마자를 연결해 주는 규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과거 문교부에서 84년, 86년에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각각 새로 제정,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에는 문제가 있다.




현재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은 ‘되도록 현지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경우,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푸슈킨’이 옳으나, 몇몇 출판사들은 현지음과는 거리가 있다며 ‘뿌쉬낀’을 고집하고 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고 제4항에 명시 되어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뿌쉬킨’이 아니라 ‘푸슈킨’이여야 하지만, ‘되도록 현지어 발음에 가깝게’ 라는 대원칙에 맞게 표현하려면 ‘뿌쉬킨’이여야 한다. 이것은 외래어 표기법 내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


브라질 화폐 단위인 ‘Real’도 같은 경우이다. 옛 스페인의 화폐단위에서 생겨난 이 말은 포르투갈어를 자국어로 쓰고 있는 브라질 현지 발음으로는 ‘헤알’과 비슷하지만 국립 국어 연구원이 발간한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 따르면 ‘레알’로 표기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또 지난 97년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마련한 표기법도 ‘레알’로 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원래 포르투갈어에서 단어 첫머리에 오는 ‘r’은 우리말 발음의 ‘ㅎ’에 가깝게 소리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축구 선수 ‘Ronaldo’를 ‘호나우도’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Real’은 ‘레알’이고 ‘Ronaldo’는 ‘호나우도’인가? 그것은 ‘Real’의 경우에는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레알’로 승인했기 때문이고 ‘Ronaldo’와 같은 사람이름의 경우엔 일일이 규정을 만들 수 없어 현지 발음에 충실하게 표기한다는 원칙에 의해 ‘호나우도’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의 통화 단위인 ‘위안’도 현지에서는 ‘위앤’으로 발음하고 있어서 표기와 발음간의 차이가 있다.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영어 단어들도 현지 발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라디오, 비아그라도 현지인들은 래디오, 바이애그라로 발음하고 있다. 이는 심의위에서 발음보다는 영어 스펠링을 기준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 말에는 /f/와 /v/, /θ/ 발음이 없고, /r/과 /l/이 구분이 힘들기 때문에 File과 Pile을 똑같이 ‘파일’이라고 발음하고, Fax와 Pax를 똑같이 ‘팩스’라고 발음한다. 또, Bolt와 Volt, Right와 Light는 각기 ‘볼트’, ‘라이트’로 밖에 쓸 수 없어 대화할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택동을 ‘마오쩌둥’으로도 쓰고 있고, 손문을 ‘쑨원’으로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된소리를 쓰지 않도록 규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순경음 ㅍ’(/f/)과 ‘순경음 ㅂ’(/v/), /θ/, /r/ 등을 표시할 새로운 문자를 도입하는 것도 정확한 음가 표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외래어 표기법의 취지가 외래어를 한글로 충실하게 표현하자고 제정된 것이므로 현지 발음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국립 국어 연구원과 외래어 심의 위원회는 외래어 사용이 빈번해지는 세계화 시대라는 점을 의식해 이러한 실제 발음과 표기상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확한 표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며, 너무 현실에 얽매여 낡은 외래어 표기법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말고 혼란이 예상되더라도 필요에 따라 개정을 함으로써 국민들의 언어 생활에 혼란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남의 말을 한글로 표시하는 외래어 표기법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말을 로마자로 나타날 때 쓰는 로마자 표기법에도 고쳐져야 할 점이 있다. 현재 전국 도로 표지판과 지하철 안내판에 모음 앞에서의 여린소리/ㄱ, ㄷ, ㅂ, ㅈ/은 /k, t, p, ch/로 표기되어 있다. /k, t, p, ch/의 발음이 /ㄱ, ㄷ, ㅂ, ㅈ/인가? 영어에서 /k, t, p, ch/는 거센소리/ㅋ, ㅌ, ㅍ, ㅊ/로 소리 난다. 따라서 영어 교육을 받아 온 대부분의 한국인으로서는 /k, t, p, ch/를 /ㅋ, ㅌ, ㅍ, ㅊ/로 밖에 읽을 수 없다. /k, t, p, ch/가 /ㄱ, ㄷ, ㅂ, 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ㅋ, ㅌ, ㅍ, ㅊ/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k’, t’, p’, ch’/가 그 답이다. /k, t, p, ch/에다가 ‘ ’ ’(어깨점)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로마자 표기법 제8항에 의하면 “인쇄나 타자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의미의 혼동을 초래하지 않을 경우 ŏ, ŭ, yŏ, ŭi 등의 ‘ ˘ ’(반달표)와 /k’, t’, p’, ch’/ 들의 ‘ ’ ’(어깨점)을 생략할 수 있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 ’ ’(어깨점)이 없어도 발음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하므로 (ex: t’al, tal 둘 다 ‘탈’로 읽을 수 있다.) ‘ ’ ’(어깨점)을 생략한다. 그러면 ‘공’도 ‘kong’이고 ‘콩’도 ‘kong’이다. ‘달’도 ‘tal’이고, ‘탈’도 ‘tal’이 된다. ‘발, 팔’ 모두 ‘pal’이고, ‘장녀’와 ‘창녀’의 구분도 사라진다. /k’, k/는 각각 /ㅋ, ㄱ/인데 ‘ ’ ’(어깨점)이 빠지면 어떻게 의미의 혼동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tch/를 ‘ㅉ’로 읽을 사람이 우리 나라에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일반 국민들은 /ㄷ, ㄸ, ㅌ/을 /d, dd, t/로 알고 있는데 반해, 로마자 표기법은 /t, tt, t’/로 정해져 있어 같은 단어 ‘tal’을 두고 ‘동상이몽’이 되기 일쑤이다.


모음의 경우에도 ‘ ˘ ’(반달표)의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기 때문에 /ŏ, ŭ, yŏ, ŭi/ 등의 발음을 올바로 실행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인이 우리 나라에 들려서 신천(Shinch’ŏn)에 가려고 하는데 신촌(Shinch’on) 표시판을 보고 내릴 수도 있지 않은가? 모음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는 /ㅓ/와 /ㅡ/의 표현인데, 이 글자들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글자이면서 독특한 소리를 나타내므로 어떤 약속기호를 잘 정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 처음 규정인 ‘조선어음 로마자 표기법’(1940)에서 /ㅓ/소리는 eo로, /ㅡ/소리는 eu로 약속기호가 정해져 벌써 60년 가까이 알려져 있으니 이를 따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물론 eo도 /ㅓ/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o는 /ㅗ/, u는 /ㅜ/를 표현하는데 주를 두고 있고, ŏ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낮고 인쇄상의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굳이 고집할 근거가 없을 것 같고 eo를 /ㅓ/ 발음으로 약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은 /eo, o, u, ŏ/ 그 어느 그 어느 것도 /ㅓ/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다른 나라에 없는 발음이므로) eu(/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u, u, ŭ/ 모두 /ㅡ/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므로 혼동을 피할 수 있는 eu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1999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되어 이런 문제들을 많이 해결하였다. 모음 앞에서의 /ㄱ, ㄷ, ㅂ, ㅈ/는 각각 /g, d, b, j/로 개정되었다. /ㅓ, ㅡ/는 /eo, eu/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파열음에서 경음이 바뀌지 않은 것은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딸기를 ‘ddalgi’로 쓰고 있는데 말이다.


이 개정안이 실행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할 것 같다. 많은 지방 자치 단체들이 이 개정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까지 써온 로마자 표기를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표지판, 터미널 등 많은 교체비용이 들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욱 반대가 심한 것은 통신업체들이다. 인터넷상에서 웹사이트 주소는 업체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하루아침에 고생해서 확보해


놓은 웹사이트 주소가 무용지물이 되니 그들의 반대는 심할 수밖에 없다. 또 김치,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 (1999)


자     음































































































한글


로마자


종전


현행



a


a



ŏ


eo



o


o



u


u



ŭ


eu



i


i



ae


ae



e


e



oe


oe



wi


wi



ya


ya




yeo



yo


yo



yu


yu



yae


yae



ye


ye



wa


wa



wo


wo



wae


wae



we


we



ŭi


ui


        모      음























































































한글


로마자


종전


현행



k/g


g/k



kk


kk



k’


k



t/d


d/t



tt


tt



t’


t



p/b


b/p



pp


p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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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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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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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h


h



zero/ng


zero/ng



n


n



m


m



r/l


r/l


     (※ 자음에서 ‘ / ’ 앞은 모음 앞일 때, ‘ / ’ 뒤는 그밖에 경우)




불고기, 갈비 등 우리 나라의 전통 음식 이름도 수출과 관련해 혼란에 빠졌다. 김치의 경우, 지금까지 kimchi라는 이름으로 수출해 왔는데, 개정안에 따라 gimchi로


바뀌면 수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김치, 부산, 김포공항 등, 모두 바꿔야 하지만 거센 반발에 주춤하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 전(2000년) 종로3가에서 안내판을 새로 가는 공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새 로마자 표기법 때문에 바꾸나 했더니 로마자 표기가 종전과 다름없는 Chongno- sam(3)-ga였다. Jongno-sam(3)-ga를 기대했던 나는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어렵더라도 국립 국어 연구원에서 큰 마음 먹고 개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주어야 한다. 물론 당장 교체 비용과 손실이 예상되나 잘못된 것은 고쳐져야 할 것이 아닌가? 중국의 수도 Beijing도 과거에는 Peijing이였다고 한다. 어차피 우리말을 로마자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현실 생활에 알맞게 표기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이번 개정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이번 로마자 표기법을 널리 시행해서 더 이상 언어 생활에 혼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 태 일  평 전  조영래 지음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 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스로 몸을 불사른 청년. 22살의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젊은이. 그는 왜 죽어야만 했던가?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쳤는가? 이런 질문을 풀려면 우리는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이 활동했던 시대는 1960년대 말과 1970년 까지이다. 이 시대는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운동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시대로써, 우리 나라의 모든 산업이 발달해 나가던 때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농지는 공장이 되고, 새로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고, 전태일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은 약속된 땅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도 거의 실업자로 지냈고, 어머니는 식모살이, 날품팔이로 겨우 겨우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독한 가난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일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학교 공부도 그만두고, 공장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간 곳이 평화 시장 옷 공장이었다. 태일은 그 곳에서 노동 지옥을 목격하게 된다.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1평에 4명이 일해야하는 좁은 작업장,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일당, 어두운 조명, 엄청난 먼지, 화학 약품 냄새, 허리를 필 수 없는 다락방, 2천명이 함께 쓰는 3개의 변소. 이러한 작업 환경으로 말미암아 5년 정도 평화 시장에서 일하고 나면 영양 실조와 소화불량,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류머티즘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이건 품팔이가 아니라 피팔이였다.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노동 지옥을 보면서 태일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런 법이 있다는 얘길 들은 태일은 없는 돈에 근로기준법 책을 사서 그 어려운 법률 책을 독파해 나갔다. 그 때부터 외롭고 처절한 태일의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고 정부 당국에 이러한 실상을 고발하고 사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토록 믿었던 근로 감독관과 노동청에게 실망한 태일은 이러한 활동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맘을 먹고 다시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태일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투쟁. 또 투쟁. 그러나 사회라는 벽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미 생명까지 바치기로 맘먹은 태일은 이 두껍고도 두꺼운 사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1970년 11월 13일 2시경,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태일은 길거리로 뛰어들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말라!’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고 숯덩이가 되어가는 태일을 구하러 온 친구들에게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지막 구호를 외치고 10시경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죽어 가는 작은 생명들에 대한 사랑, 사회라는 거대 조직에 대항할 수 있었던 그 용기,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지탱해준 의지. 이것들이야말로 청년 열사 전태일의 정수였다.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에게 평화 시장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노동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것이다. 그 이후로 노동운동은 계속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태일. 22살의 그 젊디 젊은 나이에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 그는 영원히 한국 노동운동의 지표가 될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를 읽고…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접했다. 그리고 몇몇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책을 구해서 읽었는데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모두 접하니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영화를 볼 때는, 부담이 없고 줄거리 이해가 쉽고 구체적인 시각적 장면을 제시해주어서 기억하기 쉬웠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은 놓치기가 쉽고 시각적 장면이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책이 보충해 주는 것 같다. 비록 영화가 소설이 되거나 소설이 영화화 될 때, 각색된 부분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으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본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경우, 소설을 영화화한 경우인데, 소설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원작에 없는 부분(문방구 날리기 등)을 첨가하고 미장셴을 깔끔하게 해서 완성도를 높인 것 같다. 그리고 원작보다 감동을 더욱 불러 일으킬만한 구성으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접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원작보다는 영화를 권하고 싶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1959년, 미국 동부의 웰튼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키팅이라는 새 국어 선생님이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웰튼 아카데미 고등학교는 사립 대학 진학 예비교로써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고 우수한 졸업생들을 많이 배출한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이다. 명문 고등학교인 만큼, 학생들 또한 ‘귀한 집 도련님’들이다. 이 도련님들은 품위를 지키며, 너무도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감정을 절제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비틀즈 혁명’이전으로써 학생들은 그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아버지나 선생님 등,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기성세대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엔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곧 ‘불량아’로 찍히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은 그저 아버지가 짜놓은 인생 계획표대로 살아가야만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러한 특수한 환경, 특수한 상황 속에서, 소년들이 한 사람의 이상적인 교사, 존 키팅을 만남으로써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 자신의 시로 표현하는 기쁨에 눈 떠가는 성장의 이야기이다. 존 키팅은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숨막힐 것 같은 교칙,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주위의 과잉기대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 ‘생의 정수’를 즐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또 시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며 진정으로 음미하는 황홀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학생들을 그러한 자유에로의 항로로 항해하게 하는 선장임을 자처한다.


학생들은 이 정열적인 선생을 만남으로써 그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황홀한 자유에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간다. 그러한 접근 과정에서 그들은 당황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회원들은 밤에 학교를 나가 동굴에서 자기가 쓴, 자기의 주장이 들어간 자신의 시를 자기의 목소리로 낭송하고 음미한다. 그러면서 자기표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반항은 꿈도 못 꾸던 우등생인 닐 페리가 아버지가 반대하는 연극을 하고, 찰리 달튼은 학교에 남녀공학을 하자는 글을 쓰고, 녹스 오버스트릿은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러한 자유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보수적 상황에서 키팅은 너무도 급진적인 자유를 내세웠다. 결국 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은 학교라는 억압체제에 짓눌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연극을 한 닐 페리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고 키팅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나머지 학생들은 굴욕적인 서명을 강요받는다. 자유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만큼, 학교로의 전향은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키팅을 배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 할 수가 없다. 누구보다도 여성스럽고 심약하던 토드 앤더슨이 용감하게 교장 선생님 앞에서 존 키팅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해 책상위로 올라서는 그 장면에는 사라져 가는 선장에 대한 아쉬움과 존경, 전향에 대한 사죄, 그리고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굳건한 모습에 우리는 감동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토드 앤더슨이다. 토드는 입학할 때부터 그 학교 우수 졸업생인 형의 영향으로 너무도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형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심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키팅 선생님을 만나, 시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책상에 오르고 하는 사이에 마지막 ‘죽은 시인들의 사회’모임에서는 멋진 시를 낭독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토드 앤더슨이야말로 키팅 선생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성격 변화가 가장 심했기 때문에, 토드 앤더슨의 변화를 보면 키팅 선생님의 교육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자유에의 동경은, 특수한 환경, 특수한 시대를 뛰어 넘어, 일반성을 갖는다. 자유가 억압되는 곳은 어느 환경,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고등학생 이야기 일 수도 있다. 또, 바로 우리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기라.), ‘생의 정수를 즐기라’ 는 키팅의 이야기는 결코 헛된 이야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도 시를 가슴으로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영어 교육의 문제점과 대책




우리 나라 학생들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6년 내지는 10년 동안 영어 교육을 받는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한 과목을 배운다면, 그 과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영어 교육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의 대화를 매우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TV 프로에서는 외국인을 시켜서 학생들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그 프로에 나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창하게 아니, 유창하지 않더라도 마음껏 대화를 나눈 학생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영어 실력을 검사하는 시험인 TOEFL 이나 TOEIC 점수를 볼 때, 우리 나라 학생들의 성적은 매우 낮은 순위에 올라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지금의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은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과연 지금의 영어 교육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또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 나라 영어 교육에 첫 번째 문제점은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시 전쟁이란 말로 대변되는 대학 입학 경쟁이 지금의 교육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우리 나라만의 특수성의 영향으로, 영어 교육이 외국어 능력을 학생들에게 함양시켜서 국제화,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대학 입시를 위한, 점수를 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인식되고 있지 않는 것에 현재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근시안적인 영어 교육으로 말미암아 영어를 10년이나 배우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대학생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Reading, Listening 위주의 해석 영어이다. 해석 영어는 말 그대로 남의 이야기를 읽고, 또는 듣고 그 뜻을 이해하는 ‘해석’ 위주의 영어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Speaking, Writing 위주의 작문 영어이다. 작문 영어도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을 하거나 씀으로써 남에게 정확하게 전달시키는 ‘작문’ 위주의 영어이다.


해석 영어와 작문 영어, 이 두 가지 영어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두 명이 대화를 한다고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문 영어를 하는 것이고 듣는 사람은 해석 영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책이 있다고 할 때, 책을 쓴 사람은 작문 영어를 한 것이고 읽는 사람은 해석 영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문 영어와 해석영어는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영어에 모두 능통해야만 ‘영어에 유창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은 해석 영어만을 강요한다. 우리 나라의 비정상적인 영어 교육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이다 보니 평가가 아무래도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해석 영어는 글을 주거나 또는 대화를 듣게 해서 올바로 이해했는지, 아닌 지만을 확인하면 평가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현재 대부분의 영어 시험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작문 영어는 뚜렷한 평가 기준을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평가의 객관성이 보장되지를 않는다. 평가 기준이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작문 영어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채점하기가 매우 어렵다. 수능에도 말하기 문항이 있기는 하지만 객관식이기 때문에 작문 실력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한 교사가 현재 50여명의 학생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작문 영어 교육에서는 필수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따라서 작문 영어 실력이 늘어날 기회가 없다. 대신, 단순 주입식의 해석 영어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해석 영어는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앞에 나가서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석 영어와 작문 영어 사이에 불균형이 초래되고 마침내는 들을 수만 있고 말 할 수는 없는 벙어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해석 영어를 열심히 해서 많은 단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단어들을 쓸 줄을 몰라서 허둥대는 것이 대부분의 요즘 학생들이다.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일관된 교육 정책의 부재(不在)에 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고, 이번에는 저렇게 해보고 하는 식으로 정책이 왔다 갔다 하니 학생들은 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힘들어 진다. 이번에 실시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좋은 예이다. 사전에 충분한 의견 수렴도 하지 않은 채, 교육부 멋대로 실시하였고 실시하더라도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을 교사도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제멋대로 강행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은 많은 폐단을 낳았다. 우선 교사가 준비되어 있지가 않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거의가 30대 이후 여 선생님들인데 몇 년간 안 하던 영어가 방학 때 연수 조금 받는다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가 있는가? 영어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나이를 많이 드신 교사들인데… 그런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학생은 영어 공부가 제대로 되겠는가? 오히려 흥미 감소라는 부작용만을 낳을 뿐이다. 결국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들은 학생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서투른 정책 결정과 성급한 시행이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우리 나라에 잘못된 영어 교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선, 반 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 현재 한 선생님이 50명을 데리고서는 영어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과목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특히 작문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학생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며 잘못된 영어를 바로잡아 줄 수 있도록 한 반의 인원이 더더욱 줄어야 할 것이다. 또, 교사들의 실력을 향상 시켜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해석 영어만이 아니라 작문 영어까지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앞으로의 수업 방식도 달라 져야 할 것이다. 단순 주입식이 아닌 토론, 대화식 수업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리고 무분별한 Native Speaker의 교습은 피해야 할 것이다. 들이는 외화에 비해서 별로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발음 교정 등 꼭 필요할 때만 교습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교육부의 일관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정책 결정 과정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고도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1세기가 몇 해 안 남아 있다. 앞으로 올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다. 그 정보화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우리는 외국어, 특히 영어 능력의 함양이 필요하다. 교육부가 이 점을 명심하고 올바른 정책을 수행할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