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께서 잠들어 있는 장릉 아래…

정자각 한컷!

내가 본 향나무 중에서 으뜸!!!

크기하며… 수형하며…

  스키의 기술

1. 개요




어려서부터 나는 아버지를 따라 스키장을 다녔다. 스키장을 다닌지는 꽤 오래됐지만, 제대로 스키를 강습 받아 볼 기회는 없었다. 막무가내로 올라가서 내려오기만 했을뿐…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하다 보니, 상급자들이 구사하는 고급 기술은 아무리 혼자 연습해봐도 따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키 수업을 받기로 했다. 스키 수업을 받기 전에, 스키기술을 이론적으로 공부하고 배우는게 좋을 것 같아서 자료를 수집하며 스키 기술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봤다. 그리고 요즘 각광 받는 카빙 스키와 장비 관리에 대해서도 알아보았다.






2. 스키의 역사




인류 최초의 스키로 추정되는 것은 기원전 삼천 년 경 동물의 뼈로 만들어진 눈신 모양의 것으로서, 스웨덴의 듀가르덴(Djugarden)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눈이 많이 내리는 산악지방에서 살던 조상들의 보행, 사냥, 운반 등 교통수단으로 고안된 것이라 여겨진다. 고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추운 나라에 사는 사람은 설원의 교통이나 수렵할 때 생활의 도구로 스키를 사용하였다. 북부 노르웨이에서는 스키어의 모습을 새긴 석기가 발견되었다. 스키의 어원은 ‘얇은 판자’라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Ski라는 단어의 유래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가진 학설은 없지만 고대 북부지방에서 사용된 눈 위에서 신는 신발의 뜻으로 사용된 노르웨이 말과 영어의 skid, skip, skiff, 및 skate에서 찾아볼 수 있다. 위의 단어들은 모두 ‘미끄러지는 동작’과 관계가 있다.






3. 한국 스키의 역사




한국의 스키 역사는 오래 전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산간지역 주민들이 생활 수단의 하나로 교통 및 수렵을 목적으로 썰매와 설피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렵은 겨울철 식량확보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막대기 끝에 창을 달아 몸을 지탱해 가며 멧돼지나 곰을 잡았던 것이다. 고대 썰매는 주로 고로쇠나무와 벚나무를 사용하여 만들었다. 썰매를 만들기에 적합한 나무를 선택하여 며칠간 물에 담갔다가 끌이나 대패로 깎아서 만든다. 바인딩은 썰매 중간에 네 곳에 구멍을 뚫어 짐승의 가죽이나 삼껍질 같은 것으로 신발을 매어 신는 방법을 썼다. 우리 나라의 근대 스키가 들어온 것은 구한말로 본다. 우리 나라에 스키가 처음 들어온 것은 선교사들이 국내에서 포교활동을 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그들이 겨울철 눈 덮인 산에서 스키를 즐겼다고 전해진다.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눈 기구는 함경남도 맹천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현재 일본의 조에쓰 시 종합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0년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알프스리조트에 한국스키박물관이 개장되었다. 전시실에는 고대썰매, 창, 설피 등의 실물과 썰매의 제작과정, 썰매 기술 등이 전시되어 있다.그 뒤 1929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원산 근교 신풍리에 한국 최초의 스키장이 개설되었으며 한국인 스키어가 탄생한 것은 1930년대 무렵이었다. 그러나 스키의 면모가 갖춰지기 시작한 것은 해방이 되면서부터 이다. 1946년 조선스키협회가 발족되었으며 1947년에는 지리산 노고단에서 제1회 전국 스키 선수권대회가 열렸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스키협회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958년 국제스키연맹에 가입한 이래, 동계올림픽에 태극마크를 단 선수가 출전한 것은 1960년 미국 스쿼밸리(Squaw valley) 올림픽 이후부터이다. 우리 나라에서의 스키 역사는 그리 짧은 편이 아니며, 지금은 곳곳에 스키장이 생겨나고 겨울이면 수백만의 사람들이 스키장으로 몰릴 만큼 대중적인 스포츠로 확산되고 있다. 이전의 스키는 자신의 발로 타고, 또 미끄러지는 것을 기본으로 했다. 높은 산에 들어가는 것은 겨울 산에 관한 지식이 필요하여 엄격하고 험한 알프스등은 전문가만이 들어가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 2차 대전 후 40여년에 사정은 일변했다. 세계 도처에서 높은 산에 리프트와 케이블카(곤도라)를 걸고 또 리프트가 없는 곳은 스키장으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스키인구의 급증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보급이 추진된 결과 스키장은 해수욕장처럼 혼잡하게 되어 그에 따라 동래의 넘어짐에 따른 부상이 더해져 스키어 동호인들이 충돌에 따른 상해가 급속히 증대하고 있다. 스키를 뛰어난 스포츠로 하는가 위험한 스포츠로 하는가,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멋진 스키를 건전하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스키어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각과 스키장 운영자의 안전관리가 중요하다. 스키도 스키어가 좋아하는 지형과 변화 속에서 폭과 길이도 변화하였으며 특히 단판에서 합판 글라스파이버메탈 그리고 카본 등으로 그 변화는 놀라울 정도였다. 또 교통수단으로서 발생한 스키가 스포츠로 활성화되는 동안 스키장의 장비 특히 스키 리프트와 스키 곤도라 등 기계화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리고 현재 스키 여행도 활발하며, 현재 스키어는 350만 또는 400만명 정도로 추정되나 앞으로 스키인구는 더욱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4. 생활면에서의 스키




스키는 소위 경기장이나 체육관등의 스포츠 시설에서 하는 많은 스포츠와는 달리 고아대한 은색 대자연에서 하는 야외 스포츠이다. 자연에서 즐기는 스포츠에는 등산, 해양스포츠, 공중스포츠 등 많지만, 스키는 그것 중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스키는 밸런스라는 점에서 스케이트와 가깝지만, 스케이트처럼 평면이 아니라 복잡하게 변화하는 지형, 경사면에서 하는 것이다. 또 산이라는 점에서 등산과 공통되지만, 등산은 스키만큼 다이나믹한 밸런스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스키어는 경사면에서의 변화, 요철이나 눈의 상태변화 등을 재빨리 읽고 항상 최적의 동작을 취하여야 한다. 따라서 경사면이나 코스는 여러 가지로 변화하며 일정한 것이 아니다. 눈의 질도 건조한 눈이 있는가 하면, 습한 무거운 눈, 싸라기 상태의 눈도 있고 또 경기는 제한된 기문 속을 활주하거나 긴 경사면, 아이스뱅(얼음처럼 되어버린 눈), 깊은 눈 등 변화가 있어 가상조건에 매우 좌우되는 스포츠라고도 할 수 있다. 경기는 제한된 기문 속을 활주하거나 긴 코스를 달리거나 점프처럼 수십 미터씩 공중을 날거나 하여 기록을 겨루므로 매우 다양한 스포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기록을 겨루는 것으로부터 자연을 상대로 느긋하게 즐기는 일반스키까지 그 폭은 넓다. 또한 스키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오기 때문에 스키어 스스로의 힘으로 모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물리적인 조건에 따랄 움직이고, 그것을 조화시킨 것이 스키이다. 근육과 중추신경의 미묘한 코미네이트가 멋진 몸 동작을 표현한다. 말하자면 자기자신의 컨트롤에 의한 자기표현과 자기창조를 도모하는 스포츠라고 해도 좋다. 게다가 스릴과 스피드라는 멋진 부산물도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관성이용의 특징으로 체력 차이나, 남녀노소의 차이도 없고 누구라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많은 스포츠 중에서도 스키는 ‘평생스포츠”로서의 가치가 있다.






5. 기술면에서의 스키




스키는 새로운 눈이 쌓인 산야나 다져진 경사면 등을 자유자재로 빨리 안전하게 행동한다. 그러기 위해서 “달리고, 미끄러지고. 멈추고, 돌고, 나르는” 기술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돌고 싶은 곳에서 돌고, 멈추고 싶은 곳에서 멈출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빠른 스피드로 할 수 있도록 스키어는 목표를 갖는 것이다. 거기에 기술 습득의 큰 요점이 들어 있다. 스키는 다른 스포츠와 비교하여 특수한 장비를 필요로 한다. 무겁고 자유롭지 못한 부츠, 자신의 신장보다 긴 스키 등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관성이용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스키를 조작하는데는 본능이 시키는 데로 하면 효과가 없는 일이 많다. 확실하게 기초부터 지도 받는 것이 숙달하는 지름길이다.






6. 스키의 준비물




떠나기 전에 준비물 체크리스트를 작성해서 빠진 것이 있는지 잘 챙겨보고 스키장 주변의 싸고 맛있는 별미 집들에 대해서도 찾아보고 떠난다. 스키웨어는 땀을 흡수하면서 물기를 막아주는 하이테크 섬유로 된 것이 좋다. 그러나 초보가 비싼 스키웨어를 꼭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보온이 잘되는 따뜻한 겨울옷을 입은 채로 스키를 배우는 것도 괜찮다. 준비운동을 꼭 한다. 리프트를 탈 때에는 자신에게 맞는 코스로 향하는 리프트를 선택해야 한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안내자의 지시를 따르면 된다. 플레이트의 끝을 리프트 라인에 맞추고 편안하게 앉아 안전바를 내리고 있는데 내릴 때도 자연스럽게 일어서면 그대로 전진한다. 주의할 것은 리프트에 앉아서 리프트를 흔들지 않는 것이다. 리프트는 민감하여 정지하거나 하는 반응을 일으킨다. 아래 설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조용히 타자. 실내에서 스키를 들고 이동할 때는 스키를 겹쳐 몸 앞으로 오게 하여 뒤 바인딩 부분을 손으로 잡고 스키를 어깨에 기댄 채 세워서 이동한다. 긴 플레이트를 메고 휘젓고 다니면 웃지 못할 불상사가 생긴다. 스키장 슬로프는 반드시 스키를 착용하고 다니도록 설질보호를 위해서나 안전 면에서도 꼭 준수하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 이러한 코스를 탔다!” 라는 자랑을 위해 맞지도 않는 스키 슬로프를 무리해서 내려오곤 하는데 그것은 큰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며 다른 스키어에게도 피해가 된다. 슬로프는 반드시 자신에게 맞는 것으로 선택해야 한다. 슬로프 중간에서 넘어졌을 경우 어물쩍 그냥 있으면 다른 스키어가 자신의 스키장비에 부딪혀 다치게 된다. 얼른 슬로프 가장자리로 빠져 나와 모든 걸 정비한다. 리프트 탑승 중에 음식물을 먹는다면 기본적인 규칙들을 지켜야 한다. 쓰레기를 리프트에 버린다거나 슬로프에 떨어뜨리는 것은 에티켓에서 크게 벗어나므로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한다. 레슨을 꼭 받자 친구와 식구의 비전문적 도움보다는 전문강사의 교육을 받아 기초를 튼튼히 해야 한다. 그것이 빠른 실력 향상으로서의 지름길이다. 마음의 준비는 스키는 “재미있다. 위험하다. 끝내준다” -나름대로의 세평도 많다. 사실 스키란 위험하기도 하지만 말 할 수 없이 스릴 넘치는 운동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속도나 방향이 마음먹은 대로 조절되는 것은 아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중도에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장비의 준비는 장비를 렌탈할 것이냐, 아니면 처음부터 구입해서 시작할 것인가에 대한 장단의 의견엔 극단적인 논란이 있으니 잘 선택해야 한다.






7. 초급 기술




웨지 턴(Wedge Turn) : 프르그 보겐 또는 스노우플로턴 이라고 불린다.


초보자가 처음 배우는 기술로서 언웨이팅없이 느린 속도로 턴을 할 수 있으며 모든 기술의 기초가 되는 기술이다. 시작단계에서는 엣징감각과 균형을 위하여 스키에 힘을 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타고 내려가다가 조정단계인 중반부 부터 후반부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 바깥쪽 스키를 완전하게 눌러 실행하면 된다. 중요하다.






8. 중급 기술




산쪽 슈템턴 : 산쪽 슈템 턴은 페러렐턴을 숙달시키기위해서 중요한 기술이다. 스키의 뒷부분을 넓게 하여 체중을 산쪽 스키로 이동시킨후 회전을 조정한다. 다음 계곡쪽 스키를 끌어 당기는 동작을 행하여 스키를 나란히 만들며 회전을 쉽게만든다.이러한 기술을 숙달시키면 스키를 옆으로 비틀거나 밀지 않고 스키의 회전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스키를 점차적으로 좁혀가며 연습을 하면 패러렐 기술을 습득하는데 도움이 된다.




계곡쪽 슈템턴 : 계곡쪽 슈템턴은 계곡쪽 스키의 뒷부분을 넓혀 에징을 가한 후 폴을 찍고 업을 하여 회전의 개시를 빨리 할 수 있다. 이렇게 하여 넓힌 계곡쪽 스키는 폴라인(최대경사선)으로 미끄러지는 동안 끌어당기게 된다. 계곡쪽 슈템 중에는 로테이션이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계곡쪽 스키를 너무 무리하게 넓히면 되레 역효과.계곡쪽 스키의 반동을 이용하여 신속히 이동 점차적으로 힘을 가하는 다운동작에 의해 턴을 이루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패레렐 턴(Parallel Turn) : 패러렐 턴은 회전이 진행되는 동안 스키에 힘을 가하기 위해 다리를 굽히는 다운 동작과 체중의 이동과 다음 회전의 준비를 위해 다리를 펴는 업동작을 순간순간 실행하면서 몸균형을 유지하는데 노력한다. 스키를 비틀면서 조정할 때는 폴라인(최대경사선)을 이용하여 미끄러진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한다. 또한 회전의 중심으로 몸을 약간 기울여 원심력에 적응시키고 점진적으로 다운하여 바깥 발에 균형을 유지한 다음 스키를조정한다. 이때 안쪽 스키는 자연스럽게 균형을 잡기 위해 나란히 설면에 놓아둔다. 상체는 무리한 동작을 피하고 자연스럽게 스키의 방향과 비슷하게 유지한다. 원활한 연습을 위하여 적당한 스피드에서 연습하며 두발을 이용한 연습도 한다.




쇼트스윙(Short swing) : 패레렐 턴이 짧게 압축된 것이 쇼트 스윙이다. 이 기술은 매번 턴 마다 정확한 엣징 기술과 순발력이 요구된다. 이 기술은 스키 플레이트 사이의 간격이 모아져야 하고 폴 찍기에 의한 리듬감각과 상체의 선행동작등이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기본 쇼트 스윙 : 숏 턴의 기술은 모든 스키어의 최종 목표이며 바람으로 완벽한 스키의 조절 기능이 뛰어나야 할 수 있는 기술이다. 숏 턴은 무릎을 중심으로 동작이 이루어지며 진자운동의 지점을 설면에 잘 적응시키므로 좌우의 빠른 동작을 할 수 있다. 또한 좌우 정확한 움직임에 대하여 상체는 하체와 달리폴라인(최대경사선)을 향하고 있어야 하며 상체와 하체를 자동적으로 역회전 시켜 회전을 용이하게할 수 있다. 숏 턴은 경사도가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경사도를 높여가야 하며, 여러 질의 설면에 적응할 수 있도록 숙달시켜야 한다. 또한 리듬 감각을 위해 정확하게 폴을 찍는 연습을 하여야 한다. 언웨이팅 간격이 넓은상태에서 연습하다 점차적으로 좁혀 나간다. 또한 회전을 부드럽게 하기 위하여 폴을 정확히 찍어야 한다.




엣지 셋 쇼트스윙(Edge-set swing) : 급경사의 설사면에서 사용하는 회전의 기술이다. 매턴마다 확실하고 강력한 엣지 셋을하며 엣징때 발생되는 반동을 이용하여 다음 턴으로 넘어가는 기술이다.






9. 고급 기술




웨델른(Wedeln) : 꼬리를 흔들며 계속 움직인다는 뜻으로 완 경사에서 긴장을 풀고 편안히 재미로 타는 스키기술이다. 턴을 빠르고 짧게 하기 때문에 뒤에서 보면 스키의 끝부분(Tail)을 흔들며 가는 것처럼 보인다.




밴딩 턴(Bending Turn) : 주요 특징은 무릎을 구부린 자세에서부터 시작된다. 발목, 무릎, 허리등의 골절 부분을 축으로 하여 각 근육은 충격흡수작용을 하며 스키를 설면에서 띄우지 않고 턴을 빠르게 처리한다. 이때 폴찍기는 대단히 중요하며 폴을 찍는곳을 중심으로 확실한 토크에 의해서 스키플레이트가 트위스트된다. 이 토크를 만드는 힘이 허벅지와 무릅, 발이 한꺼번에 움직일 때 효과적이다. 벤딩 턴의 외형을 볼 경우 상체가 일어나는 동작은 보이지 않는다. 다리수축에 의한 언웨이팅이 앉는 자세에서 흡수되며 회전 동작에서는 다리를 펴는 듯 하기 때문에 설사면에서의 깨높이가 일정하게 움직이는 것이다. 언웨이팅을 폴 라인에서 폴 찍기와 동시에 실시하며 다리수축과 함께 턴의 시작단계로 엣지를 바꾸고 엣징된 스키가 회전할 수 있도록 다리를 폈다가 회전이 끝나면 다리를 구부리고 다음 턴을 준비한다. 폴라인에서 가까을 경우 앉고 폴라인에서 멀어질 경우 다리를 펴는 것이다.




제트 턴(Jet Turn) : 밴딩턴 의 한 부분으로서 눈의 저항이 많은 설면에서 구사하는 기술이다. 턴의 시작을 밴딩턴을 기본으로 하여 회전 시점에서 인위적으로 스키의 앞 부분에 힘을 주어 밀면서 회전을 시킨다. 중력과 관성의 힘만으로 턴을 하기에 부족할 경우에는 강력한 턴을 반들어낸다.




캉가루 턴(Kangaroo Turn) : 밴딩턴 의 한 부분으로서 눈의 저항이 많은 설면에서 사용할 경우 효과가 높다. 캉가루처럼 뒤로앉는 자세에서 턴을 만들어가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이 턴을 구사하려면 발의 뒤쪽을 지탱해주는 높은 스키부츠가 필요하다.




점프 턴(Jump Turn) : 패레렐 턴 중 가장 상급의 기술이다. 트레버스한 다음 공중에서 180도회전하여 아무리 어려운 지형과 설면에서도 쉽게 턴을 할 수 있다. 점프턴에서의 폴찍기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몸이 공중에서 동작을 수행하는동안 필요에 따라 체중을 지탱해주는 역할도 한다. 점프를 위한 움추린 자세에서 폴을 찍고 강하게 두 개의 스키를 점프시킨다. 순간적으로 호핑된 상태에서 체중을 폴에 싣고 몸을 돌려 턴을 시작한다. 착륙시에는 충격을 허벅지 근육으로 흡수하여 부드럽게 착지하고 바로 트레버스하여 다음턴을 준비한다.




터레인 점프(Terrain Jump) : 언덕을 뛰어내리거나 장애물 혹은 작은 계곡을 넘을 때 사용되는 점프가 터레인 점핑 이다. 점프를 하기 전에는 아래에 있는 위험에 대해 항상 대비한다. 스키의 속도는 관성에 의해서 장애물이나 계곡을 충분히 뛰어 넘을 정도의 속도가 되야 한다. 점프의 시작은 상체를 앞으로 구부렸다가 뛰어오른 다음 중간에서는 무릎을 가슴으로 끌어올린 동작으로 움추린다. 착륙시에는 상체의 균형을 지형에 맞추고 다리를 편 다음 착지의 충격을 허벅지로 흡수하여 구부려준다. 그리고 다시 정상적인 자세로 돌아온 다음 다음회전을 준비한다.




스텝 턴(Step Turn) : 스텝을 한번 옮기는 과정을 통해 언웨이팅과 스키의 회전이 해결되고 필요에 따라서는 회전반경을 크게 하거나 빠르고 짧게 변경할 수 있다. 익숙해지면 스텝을 옮길 때 아래쪽 스키를 밀어 치면서 얻은 힘으로가볍게 가속할 수 있다.






10. 카빙스키의 분류




이지 카버(Easy Carver) : 이 스키 타입은 전통적인 스키 테크닉을 구사하는 스키어들이 카빙스키로 새롭게 시작하려 할 때 쓰인다. 이 모델은 앞 부분이 다른 카빙 스키와 구분시 중간 넓이이며 사이드컷 또한 그다지 크지 않다. 즉 사이드컷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지 카버의 회전의 크기는 20m~30m이다. 이 카테고리의 스키 길이는 160~180cm이며 스키어의 키는 전혀 상관이 없다. 스키어들은 회전의 크기와 스키의 길이에 따라 손 쉽게 다룰 수 있는 스키를 택한다. 좀 더 쉽게 스키를 탈려면 짧은 것을 선택하면 된다. 숏턴을 주로 타려면 원의 크기가 적은 스키를 선택하면 되는 것이다. 당신이 새로 자동차를 구입하려하면 자동차의 기능을 보듯이 자동차 크기를 생각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 카테고리에서 경험하는 것은 약간의 카빙을 맛보려하지만 주로 스키딩 턴을 구사하는 스키어들에게 알맞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델로 정확한 카빙을 구사하려면 공간이 많이 필요하며 넓은 슬로프에서 속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적절한 기술로 카빙을 할 수 있다. 이지 카버는 슬로프가 아닌 곳과 파우더 스키를 위해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전통 스키 기술과 드리프팅 턴 구사에 만족하는 스키어들에게는 이 이지 카버를 추천할 수 있다.




2) 올라운드 카버(Allround Carver) : 올라운드 카버는 지금까지 흔히 일컫는 카빙 스키를 말한다. 이 카테고리가 새로운 이름 “카빙”을 만든 것이다. 사실 이지 카버와 올라운드 카버의 커다란 차이점은 없다. 기본적인 특색이라면 전문 판매인들에 의해 스키 길이가 190cm까지 추천되어 진다. 회전 크기(radius)는 20~35m 사이로 회사마다 차이가 있다. 이 올라운드 카버는 일반적인 스키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어떠한 슬로프 조건, 눈 조건에서도 편안한 기능성을 맛볼 수 있는 스키이다. 올라운드 카버는 슬립과 드리프트 턴을 다양한 슬로프에서 적절히 섞어가며 타기에 알맞은 스키이다. 또한 파우더에서도 좋은 성능을 나타낸다. 진정한 키방은 넓은 슬로프에서만 가능하며 빠른 속도로 타는 것이 전제 조건이다.




3) 레이스 카버(Race Carver) : 레이스 카버는 스키 시합 컨셉에서 유래한다. 스키의 길이는 180~205cm이며 사이드 컷은 회전이나 대회전 경기에 맞는 크기이다. 즉 회전의 크기가 20~35m 사이이다. 이 스키로서 카빙의 진수를 맛볼려면 상당한 실력의 스키 기술과 매우 빠른 속도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기술을 구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스키로는 일반 슬로프에서는 그 진가를 맛 보기가 힘들다. 즉 경주용 자동차로 교통이 복잡한 시내를 달린다고 생각해 보라. 레이스 카버는 스키 시합을 위주로 컨셉을 정한 것이다. 스키 시합을 원하는 스키어들에게는 가장 적합한 스키인 것이다.




4) 펀 카버(Fun Carver) : 펀 카버는 진정한 카빙 스키이다. 다른 카테고리의 스키는 이미 과거의 유사한 모양으로 존재해 있었다. 펀 카버는 160cm에서 120cm까지 길이이며 카빙 기술을 구사하면 거의 모든 눈 조건에서 장점을 나타낸다. 단지 다른 모델에 비하여 초보자나 카빙스키로 새로이 출발하는 사람을 위해 타기가 쉬울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2m이상의 스키를 타던 스키어에게도 새로운 스키의 장을 맛볼 수 있게 하여 준다. 상급자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 스키로 카빙을 즐길 수 있으며, 초.중급자일지라도 쉽게 카빙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130cm 정도의 펀 카버는 극단적으로 빠른 리엑션을 취할 수 있으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조정할 수 있다. 스키 길이 140~160cm 스키로는 빠른 속도에서 완전한 턴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턴은 당연히 엣지로만 타는 카빙턴을 전제로 한다. 회전의 크기는 7m에서 10m 사이가 된다. 모델은 스키어의 스키 실력과 신체(신장, 체중)에 따라 선택한다. 100kg이 넘고 상급자인 경우 130~160cm 의 스키 길이를 택하면 소프트한 눈에서도 충분한 스키 바닥 면적으로 인해 안정된 턴을 할 수 있다






11. 장비 관리




스키를 타고난 뒤 마모되거나 파손된 부분을 손질하고 보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스키의 바닥면과 엣지가 파손되었거나 왁스칠이 잘 안돼있는 상태로 스키를 타면 스키를 잘 타기 어렵다. 스키관리를 위해 필요한 작업을 알아본다.




흠집·구멍 땜질 : 스키바닥에 왁스가 남아 있으면 땜질이 잘 안되므로 바이스에 스키의 바닥면이 위로 오도록 고정시킨 다음 왁스를 제거하고, 손상된 부위를 조심스럽게 닦아낸다. 흠집이 있는 부위에 보수용 왁스(P-Tex)를 다리미 등으로 녹여서 메운다. 메워진 주위는 줄을 사용하여 스키 바닥면과 같이 평평하게 갈아낸다.




스키바닥면 닦기 : 스키를 계속 타거나 여러 차례 수리를 하면 스키 바닥에 왁스 찌꺼기가 남는데 이를 철제 주걱(Scraper)을 사용하여 긁어낸다. 주의할 점은 주걱을 자기 몸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사용해야 한 다. 그리고 입자번호 100과 180의 사포(Sanding Paper)를 이용해 각각 3~5회 바닥면을 다듬는다. 바닥면 닦기 작업은 시즌 중 2~3회 실시한다.




스키바닥면에 엣지 깎아내기 : 스키의 바닥면이 평평하지 않고 볼록한 경우에는 회전성은 좋지만, 눈이 녹은 다음 얼어붙은 지형에서 엣지의 제동력이 약해 스키가 의도한대로 활주하지 않는다. 반면 바닥면이 오목하면 엣지에 많은 압력이 걸려 회전성이 좋지 않지만 엣지의 제어력은 강하다. 따라서 스키의 바닥면을 평평하게 다듬거나 또는 바닥면을 평평하게 하되 가장자리를 0.01~0.02mm 정도 더 깍아낸다.




엣지날 세우기 : 엣지 날이 무디면 경사가 심한 어려운 코스나 얼어붙은 눈 위에서 턴하기 어렵다. 날을 세우기 위해 바이스에 스키를 고정 시켜 두고 가는 줄을 사용하여 엣지를 깍아 낸 다음 줄에 페이퍼를 감아 서 잘 다듬는다. 새로운 스키를 사용하기 전에는 스키 앞부분의 엣지를 무디게 해준다. 이것은 턴할 때 가해지는 힘 때문에 스키 앞부분이 쉽게 마모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스키의 뒷부분도 무디게 갈아줌으로써 모글 같은 곳에서 턴하는 동안 손상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왁싱 : 왁싱의 주요 목적은 스키가 갖는 기능 중 활주기능을 좋게 하는 것이다. 스키의 바닥면에는 작은 구멍이 많이 있는데, 왁스는 이 구멍을 통해 흡수된다. 스키는 눈과 왁스 사이에 인체의 압력으로 눈이 녹아 생긴 작은 물방울이 윤활제 역할을 함으로써 미끄러진다. 따라서 왁스의 상태에 따라 스키가 미끄러져 가는 속도가 달라진다. 왁싱을 너무 연하게 하면 윤활제 역할을 하는 물방울이 잘 형성되지 못한다. 반대로 왁싱을 딱딱하게 하면 물방울이 잘 형성되어 잘 미끄러지기 때문에 조절하기 어렵다.




보관 : 왁싱이 끝나면 스키 끝 부분을 합성천이나 비닐로 쌓고 스키 바닥이 서로 닿도록 하여 묶어둔다. 스키를 타지 않는 기간에 스키를 보관하기 위해서는 왁스 제거제를 뿌려 스키 바닥을 닦아내고 다른 이 물질도 제거한 후 그늘진 장소에 보관한다. 스키는 세워서 보관해야 형태가 변형되지 않는다. 가까운 스키 가게나 스키장에 맡겨두고 보관하는 방법도 좋은 방법이다.




☞ 플레이트 : 베이스와 에지, 그리고 켑버를 유지하는 몸체로 이루어져 있다. 장시간 보관할 경우에는 전문 샵에 의뢰하여 바닥이 파인 부분을 때우고 에지를 세워 두어야 한다. 에지는 녹이 생기지 않도록 수돗물로 잘 씻은 후 바닥면과 측면에 왁스를 충분히 묻혀 두어야 하며, 베이스에도 소프트 왁스와 하드 왁스를 같이 발라준다. 플레이트는 사이드 컷 부분에 신문지나 그 외의 물체를 받쳐주어 휠링을 유지하며 플레이트의 앞과 뒷부분은 얇은 종이를 끼워 고정시켜야 베이스 면끼리의 마찰을 없앨 수 있으며, 가방에 넣어서 통풍이 잘되고 그늘진 곳에 세워서 보관한다.




☞ 부츠 : 잘 세탁해서 말린 후 보관한다. 아웃 부츠는 오일 성분이 없는 클리너와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주고, 세탁을 할 때에는 이너 부츠만 빼서 가급적 세제를 쓰지 않고 세탁한다. 세탁한 부츠를 말릴 때는 헤어 드라이어를 사용해도 괜찮다. 이너 부츠 안에 신문지로 싼 나프탈렌을 넣어서 접힌 부분이 없도록 아웃 부츠인 플라스틱 부츠에 잘 넣고 버클은 조임새에 힘이 들어가지 않도록 잠근 후 가방에 넣어서 그늘지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보관한다.




☞ 바인딩 : 시즌이 끝나면 날씨 변화에 따라 바인딩에 균열이 생길 수 있으므로 바인딩을 풀어줄 필요가 있으며, 피로 강도에 의해 파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프링 장력을 풀어주고, 바인딩 스프레이를 약간 뿌려주어 틈 사이에 먼지가 끼는 것을 막아준다.




☞ 폴 : 별도의 보관 방법이 필요하지 않다. 플레이트와 함께 넣어서 세워두고, 이때 주변의 다른 물체로부터 측면 압력을 받지 않도록 보관하도록 한다. 요즘에 판매되는 바인딩이나 폴은 특별히 녹 제거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은 제품들이 많기 때문에 깨끗이 닦아주기만 하면 된다.




☞ 스키복 : 패션과 방수, 방풍, 발수기능을 가진 복합 운동복이다. 대부분 스키복을 세탁할 때 드라이를 하는데 너무 잦은 드라이로 인해 방수기능이나 발수기능을 상실할 수도 있다. 세탁을 자주 하는 것은 가급적 피하면서, 구입 후 한두 번만 드라이를 해주고 다음부터는 물 세탁을 하는 것이 좋다. 축축하면 통풍이 잘되는 곳에 말리고 구김이 가지 않게 보관한다. 스키복은 곧바로 세탁하지 않으면 땀이나 오물 등의 냄새가 배어 얼룩이 생기기 쉽다. 드라이 클리닝을 마친 후, 바지는 구김이 적게 선을 따라 접어서 보관하거나 걸어둔다. 하의보다 보관이 편리한 상의는 팔 부분과 가슴선 아래 라인을 따라 두 번 정도 접어서 보관한다. 습기와 곰팡이 제거를 위해 방습제를 넣어둔다.




☞ 고글 : 상자에 넣어서 다른 물체와 접촉없이 보관해야 렌즈의 손상도 막고 뒤틀림을 막을 수 있다.




☞ 장갑 : 대부분의 가죽을 많이 쓰는데 사용 후에는 왁스나 콜드크림으로 닦아서 비닐이나 신문지에 넣어서 보관한다. 특히 사용 중에도 왁스나 콜드크림을 발라주면 수명이 연장되고 부드러운 감촉을 유지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 – 메구로 가조엔-을 보고








과목 : 한국 전통 미술의 이해


학과 : 컴퓨터학과


학번 : 99200219


이름 : 변증현










메구로 가조엔… 일본의 한 연회 건물이다. 다큐멘터리는 이 낯선 건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건물은 1931년 ‘호소카와’라는 일본인에 의해서 지어졌다. 서민들도 예술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가져야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졌다. 호소카와가 선택한 예술품은 조선 나전 칠기였다. 이를 위해 조선에서 많은 장인들을 불러와서 공사를 시작했다. 작은 재떨이에서부터 방 한 쪽 면을 다 채우는 작품까지 메구로 가조엔은 온통 아름다운 나전칠기로 장식되어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이들은 작품에 이름조차 남기지 않았다.




오늘날 호소카와의 후손이 메구로 가조엔을 12층 현대식 건물로 새로 지으면서 다시 한국에서 전용복을 비롯한 많은 장인들을 불러와서 복구 작업을 진행했다. 그들은 합숙을 하면서 무섭게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치쿠하’라는 방이다. 방문자체가 1m가 넘는 새우 모양 자개이고 안에 들어가 보면 한쪽 벽면과 천장이 모두 나전 칠기로 되어있다. 규모도 그렇게 어마어마할 뿐 아니라, 두루미의 깃털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표현했다. 이밖에 23.7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나전 칠화도 여기에 있고 이 건물의 엘리베이터 문조차도 자개로 되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멋진 예술 작품을 보면서 입안이 씁쓸해지는 이유는 뭘까? 이 건물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면, 아니 저런 작품을 만들어낸 장인들이 우리나라 장인들이 아니었으면 이렇게 속이 쓰렸을까? 저렇게 훌륭한 솜씨를 가지고도, 저런 건물이, 저런 작품이 우리나라에 없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하나? 과연 메구로 가조엔을 우리나라 장인들이 만들었다고 우리나라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주인은 ‘호소카와’의 후손이다. 누가 만들었던간에 그 작품들은 일본에 있고 일본인의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는 마지막에 ‘문화는 만드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는 사람의 것’이라고 한다. 문화에서도 수요에 따라 공급이 좌지우지된다. 조선시대말, 아니 임진왜란 이전부터 일본인들은 우리 문화에 주목했고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를 통해 계획적으로 기술자와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서 자기네 문화에 흡수시켰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 문화에 별 관심을 쏟지 않았고 조선말에 들어서는 쏟아져 들어오는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기 바빴다. 결국 오늘날, 더 우수하고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던 도자기와 나전칠기는 일본의 흡수와 적극적인 해외 홍보로 일본의 효자 문화 수출 상품이 되었다. 나라와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일본 문화의 발판만 되어준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을 미워하기에는 우리 탓이 더 크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관심이 없었더라면 우리 문화는 더 아름답게 폈을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지만 무관심 속에 그냥 사라져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 속에서 교훈을 얻어 지금이라도 우리 문화의 주체성을 갖고 깊이 향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먼저 적극적으로 즐길 때, 살아있는 전통문화가 꽃 필 수 있는 것이고 이렇게 문화가 꽃 필 때, 문화 선진국으로서 문화도 수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럴만한 재주가 있는 민족이다. 새로 뽑은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부에서도 문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적극지원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국 현대 사진전을 보고…






컴퓨터학과


99200219


변증현






말로만 듣던 호암 아트홀을 찾아 갔더니 중앙일보 사옥이 나타났다. 사옥 안에 들어가서 어리둥절해 하고 잘못 들어왔나 싶었다가 안내원에게 물어 봤더니 안내원이 지하로 안내해주었다. 4000원의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니 되게 좁아 보였다. ‘이게 무슨 호암 아트홀이야…’ 생각을 했었는데 작품따라 가다보니 규모가 꽤 컸다. 생각지도 못한 2층도 나타나고… 사진전이어서 그런지 사진기 가지고 다니는 학생들로 전시회장은 북적거렸다.




미국 현대 사진전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소장품 중에서 미국현대사진을 대표하는 작가40명을 선택해서 113점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현대사진의 세 가지 주제 – 현실, 정체성, 일상 – 에 따라 3개의 전시관으로 나누어 전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걸 모르고 한쪽 벽면을 따라 봤기 때문에 순서가 뒤죽박죽되었다.




사진들을 보며 첫 번째로 느낀 것은 ‘이런 것들도 사진의 소재가 되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내가 찍는 사진들이야 친구들을 찍거나 멋진 경치를 찍는 정도였지만, 전시된 작품들은 사진을 찍기도 하고 거울을 찍기도 하고 모형을 만들어서 찍는 것, 실로 형태를 만들어 찍는 것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사진도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예술’의 일부임을 이제야 알았다.




또 느낀 점은 찍은 사진도 그냥 사진을 걸어 놓는 게 아니라 오려 붙이기도 하고 뚫어서 물감이 튀어나오게 하기도 해서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흑백 사진의 경우, 현상/인화 작업으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 샐리 맨의 ‘다섯 살 때의 제시’라는 작품을 보고 알았다.




세 번째로 느낀 점은 작가들의 ‘인내’였다.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다. 순간을, 찰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기다리고 자기가 뿌린 씨가 뿌리 내리고 자라기를 기다리고, 사람의 나이 들어감을 나타내기 위해 세월을 기다려서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낸다.




전시된 작품 중에서 일반적으로 아름답다고 얘기하는 ‘미적 쾌감’을 주는 것은 별로 없었지만 사회 고발적인 사진들, 미국과 미국인의 진솔한 모습을 나타내는 사진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작품’이었다. 왜냐하면 사진이란 미술에서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것을 잡아두는 도구로서 미술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첫 인사동 갤러리 방문






컴퓨터학과


99200219


변증현






호암 아트홀 안내책자를 받아보니 호암 아트홀 표 한 장으로 로뎅 갤러리까지 관람할 수 있다고 했다. 마침 잘 됐다 싶어서 로뎅 갤러리를 찾아 갔더니 실망스럽게도 전시 준비 중이었다. 대신에 겉으로 지나치기만 했던 인사동 화랑들을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로 들린 곳은 갤러리 상이었다. 인사동 큰 길 바로 옆에서 있어서 눈에 잘 띄는 화랑이다. 거침없이 문들 열고 들어가보니 1층은 ‘류영도’씨의 그림을 전시하고 2층은 ‘김계환’씨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었다. 1층은 거의 모두 누드화었다. 여성의 알몸을 그려 놓고 그림 여기저기에 흰색 물감으로 거칠게 부분부분 지웠다. 이 것이 무슨 의미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2층에 올라갔더니 바위를 뚫고 나오는 풀, 꽃 들을 그린 그림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둘러봤지만 특별히 맘에 드는 그림은 없었다.




다른 미술관이나 박물관 다닐 때와는 달리 ‘그림을 살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들어가니 그림이 색다르게 눈에 들어왔다. 그전엔 맘에 드는 것도 ‘와~ 멋지다.’하고 그냥 넘어갔지만 갤러리에서는 가격도 알아보게 되고 우리 집 어디에 놓으면 좋을지도 생각하게 됐다. 아직은 학생 신분이라 돈이 없어서 큰 그림은 욕심도 못 냈지만 작은 그림은 가격도 물어보고 다녔다.




그 다음에 들린 곳은 통인 갤러리였다. 이전엔 예쁜 전통 공예품 때문에 1,2층은 구경했지만 5층까지 올라가서 관람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곳에서는 서국진씨의 연리문 도자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단아한 사각형 도자기에 불규칙적인 색이 섞여 있었다.  연리문이란 색이 서로 다른 흙을 섞어서 무늬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란다. 처음보는 신기한 무늬의 도자기가 내 눈을 사로잡았다. 도자기 하나하나가 매우 예뻤다. 색도 곱고 모양도 참해보였다. 특히 어떤 도자기는 그 무늬가 우리나라의 산을 닮아서 풍경화 같은 도자기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13세기경 고려시대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작업의 난해함으로 사라졌다는데 원하는 무늬를 만들어 내자면 대단한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앞으로 많이 발전하지 않을까? 하나쯤 가지고 싶어서 가격을 보니 최하가 30만 원대요, 최고는 몇 백 만원이나 나가는 것이었다.  체념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인사 갤러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 1층, 2층 모두 다른 전시를 하고 있었다. 1층에 들어서니 눈이 환해지고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곳에 전시된 그림은 모두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깔로 그린 꽃과 나비와 새들이었다. 너무나 단순해서 초등학생이 그린 듯한 예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이었다. 이 또한 하나쯤 갖고 싶었지만 그림들이 모두 커서 포기했다. 지하로 내려가니 특이한 사진 전시를 하고 있었다. 사진에 구멍을 뚫고 뒤에서 물감을 구멍으로 나오게 한 사진들이었다. 그 물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다. 보니까 한켠에 인사갤러리 상설 전시관이 작은 방에 꾸며져 있었다. 거기엔 조각과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나오는 길에 ‘정일’작가의 작은 액자 가격을 물어봤더니 6만원이라고 했다. 3만원밖에 없는 내 지갑으로는 택도 없었다. 2층에는 ‘A tempo’ 라고 해서 음표들을 다양한 소재로 그려 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린 곳은 경인 미술관이었다. 한 전시관에서는 한 물레쟁이의 토기(?)를 전시하고 있었다. 일부러 삐뚤고 못생기게 만들어 놔서 -물론 뭔가 나타내는 게 있겠지만 – 간단히 둘러보고 나왔다. 다른 전시관에서는 한 여성작가의 수채화 전시회였는데 중/고등학교 때 그리던 정물화였다.  꽃과 과일 바구니를 주로 그렸다. 그리다 실수를 했는지 여기저기 물방울이 튄 자국이 보인 것 빼고는 별로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작은 그림 액자를 하나 샀다. 그러고 나니 왠지 나도 그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 좋았다. 내가 그린 것은 아니라도 그림을 선물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TV에서 세계국술대회에 대한 프로그램이 방영하고 있다. 미국내에 널리 퍼져 우리 한국을 미국인들에게 알린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130만명이란다… 태권도와 함께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리는 국위 선양을 하는 기특한 무술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하나 같이 전통 무예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통이라함은 옛 조상들로부터 이어저 내려온 문화라고 생각한다. 과연 국술이나 태권도가 옛 조상들이 해오던 무술인가? 내가 알기로는 아니다. 뭐 내가 이 글을 쓰기 위해서 많은 연구를 한 것은 아니지만 나 나름대로 무술에 관심을 가지며 본 바에 의하면 – 결론부터 짚어가자면 – 현재, 택견 이외에는 전통 무술은 없다는 것이다.

전통 무술을 자처하는 무술들을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태권도도 예외는 아니다.) 바로 ‘해방 이후 누가(혹은 어느 단체에서) 무엇을 보고(옛 무예문헌 또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무술들) 창시해낸 것’이라는 점이다. 기억나는 대로 읊어 보자면, 태권도, 기천, 국술, 궁중 무예, 18반 무예, 뫄한머루, 수박도, 한무도 등등이 그것들이다. 따라서 이 무술들은 선조들로부터 전승 받은 사실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일제 시대에 공수, 당수, 유도, 검도 등 일본 무술을 익힌 무술인들이 해방이후 국내 자료를 바탕으로 수련 과정들을 ‘창시’한 것이다. 무엇을 보고 만들었냐만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름도 그럴싸하게 전통적인 이름을 지어놓는 것이다. 좀 더 심하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일본 무술을 전통 자료로 포장해놓고 전통 무예라 선전 하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이 싫다. 사실 일본 무술과 별 기본적인 차이가 없는데도 유구한 역사를 가진 전통 무예인 척하는 것이 싫다. 국기라 불리는 태권도도 해방 직후 여러 일본 무술 도장 사범들이 모여서 기술 체계를 완성한 무술이다. 그 과정에 택견꾼은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름은 택견하고 비슷한 태권도로 지어서 역사서 속의 모든 ‘텩견’,’탁견’,’태껸’을 자기네 들이 계승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고 있다. 체육교과서엔 아직도 그렇게 써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고구려의 상무정신과 신라 화랑도부터 시작해서 고려시대 외침 얘기 좀 넣어주고 조선시대 자료 좀 소개하고 이런 역사적 전통을 이어받아 누가(대부분 대한민국 전/현직 OO협회 회장일 것이다.) 언제 정립해서 계승하였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적인 레퍼토리이다.

내 생각에는 전통 무예라 말 할 수 있으려면, 조선시대에 무술하는 사람에게서 전승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무술을 익힌 다음에야 이를 바탕으로 무예문헌의 그림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한다. 나는 그런식으로 접근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일본무술의 변형’이 아닌 ‘전통 무술’이 나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전통 무예라고 자처하는 무예들이 ‘약하다. 배우면 안된다.’ 뭐 이런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다만 역사를 속이고 전통무예임을 자처하는게 싫을 뿐이다. 태권도와 국술이 세계에서 한국을 알리는 첨병 역할을 한다면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다. 이들이 ‘전통 무예’ 가 되기 위해서는 몇 백년간 우리 민초속에 뿌리 내려야한다.

덧말> 혹시 위에서 열거한 무술 중에 제대로 전승 받은 무술이 있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아마도 저의 좁은 견문때문일 것입니다.

 

국립 중앙 박물관




컴퓨터학과


99200219


변증현




이번 여름 방학 때, 친구를 따라 세종로에 갔다가 광화문 안으로 들어간 적이 있다. 실로 조선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처음이었다. 중학교 때였나? 학교에서 견학 간 이후 처음으로 조선 총독부 건물이 없는 경복궁을 볼 수 있었다. 비로소 탁 트인 것 같았다. 인왕산도 보이고 북악산도 보이고… 그전에는 조선 총독부 뒤에는 가본 적이 없어서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몰랐었다. 부끄럽게도 경복궁도 가본 적이 없었다. 국립 중앙 박물관(당시 조선 총독부 건물)을 다 보고 나면 꼭 경복궁 관람시간이 끝났었다. 그러나 이제 탁 트인 시야에 안보이던 것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경복궁 서편에 새로 지어진 국립 중앙 박물관도 그 때 알았다. 시간이 없어서 그때는 그냥 돌아갔지만 다음에 꼭 한번 들려야겠다고 생각했었다. 2학기가 개강하고 교양으로 ‘전통 미술의 이해’라는 과목을 듣는데 리포트가 전시관을 관람하고 감상문을 써오는 것이었다. 나는 ‘옳다구나!’ 국립 중앙 박물관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경복궁은 ‘근정전’이 보수 중이었다. 꼭 한 번 가 볼 생각이다.)




이전 박물관과 비교했을 때 규모가 너무 작은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어째 통일 신라 이후 고려, 조선시대 전시가 따로 없었다. 대신 고려자기, 회화, 역사 자료 등 주제별로 전시가 되어있었다. 새로 용산에 국립 중앙 박물관을 짓는다니 그때 다 전시되겠지… 하고 생각하고 관람을 시작했다.




2층 석기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주욱 훑고 지나갔다. 수업시간에 들은 것이 있으니 혹시나 산수화가 있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다른 몇몇 유물들이 내 눈을 잡아끌었다. 특히 ‘낙랑 금제 허리띠 장식’은 절대 잊을 수 없다. 다른 유물들은 변색되고 손상되어 세월의 때가 묻어나지만 ‘낙랑 금제 허리띠 장식’은 그 오랜 세월에도 변함  없이 찬란한 금빛을 발하고 있어 전시관에서도 눈에 확 들어 왔다. 가까이 가서 보니 디자인과 모양도 오늘날의 것에 전혀 뒤떨어짐이 없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더 놀라운 것은 허리띠 장식 뒷벽에 사진이 붙어 있었는데 허리띠 장식을 확대 촬영한 사진이었다. 실물은 너무 작아서 눈치 채지 못했지만 사진으로 보면 그 허리띠 장식에는 눈으로 보일까 말까한 미세한 금 구슬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었다. 내 생각에는 오늘날에도 하기 힘든 엄청난 기술이다. 몇 천 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작은 금구슬을 만들고, 또 그것을 촘촘히 박아 넣는다는 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밖에 교과서에 나오는 여러 유명한 유물들을 보면서 진품인지가 의심스러웠다. 그전에 박물관에 올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몇 천 년 전에 만들어진 물건들이 아직까지 보존이 잘 되어서 이렇게 전시되어 있다는 것이 너무 신기했다. 복제품이 아니면서 이렇게 온전하게 전해질 수 있는지가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국보와 보물을 보면서 이렇게 귀한 것들을 이렇게 전시해도 되는지가 궁금했다.


2층에서 ‘고려․조선의 대외교류’라는 특별전이 하고 있었다. 규모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한국 역사와 국제적 환경’이라는 교양과목을 들었었는데 그 과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됐다. 




1층으로 내려오니 경복궁 모형이 두개가 보였다. 일제 훼손 전․후 모습이었다. 정말 가관이었다. 우선 총독부가 세워지면서 주위 건물들은 모두 밀어버리고 공원을 만들었고, 광화문도 동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세종로의 행정 건물들은 모두 ‘신식’건물들로 바뀌어버렸다. ( 그 ‘신식’ 건물들이 좀 대단한 것들을 갖다 놓은 줄 알았는데 보험회사, 경찰 연습소 같은 한심한 것들이었다. ) 더 기가 막힌 것은 경복궁 뒤 북악산에 조선 총독관저가 들어섰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1층은 도자기와 회화, 금속 공예로 나뉘어져 있었다. 아름다운 고려청자의 빛깔과 재밌는 연적들의 모양을 감상하는데 몇몇 생각 없는 관람객이 플래쉬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는 바람에 김빠진 채로 도자기관을 나왔다. 드디어 회화관. 수업시간에 배운 것 좀 보려고 기대했는데 그림도 몇 점 없고 유명한 그림도 별로 없어서 실망했다. 다만 겸재 정선의 그림 몇 점으로 위안을 삼았다. 수업을 듣고 보니 이해가 더 잘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들어 온 것은, 다른 유물에 비해 회화 관리가 어려운지 다른 전시관에서는 안보이던 기계가 작동되고 있었다. 금속 공예도 보고 지하의 역사 자료들과 기증 전시실도 모두 보았다.




새로 지은 국립 중앙 박물관은 관람도 쉽고 편의 시설도 많고 재밌게 잘 꾸며 놓았다. 그러나 규모가 작아 조금 빨리 돌아보니 두 시간이 채 안 걸려서 아쉬웠다. 고려․조선 시대관도 없었고… 그리고 관람객들이 주말이라 많아서 그랬는지 너무 정신없고 무질서 했다. 아이들도 많고, 사진도 찍고, 쓰레기도 버리고… 좀더 성숙한 시민의식이 아쉬웠다. 산수화를 많이 접해보지 못한 것도 내내 아까웠다. 빨리 용산에 새 중앙 박물관이 지어져서 많은 유물들을 전시했으면 한다. 그리고 현재 경복궁과 세종로의 모습도 어떤지 궁금했다. 또 어떻게 바뀔지… 또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한번 생각해 볼 문제라고 생각한다.

 

靑田 이상범의 眞景山水




컴퓨터학과


99200219


변증현




교수님의 추천도 있고,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을 직접 겪어 보고 싶어서 시간이 나는 대로 ‘갤러리 현대’에서 열린 ‘청전 이상범의 진경산수’를 보러 갔다. 원체 살아오면서 이런 문화생활은 거의 접해 보지를 않았는지라, 갤러리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조차 왠지 나에겐 낯설었다. 건물도 하나 같이 개성 있고 그 나름의 멋을 지니고 있었지만 왠지 폐쇄적인 느낌이 들었다. 정말 이런 곳은 내가 다닐 곳이 아닌, ‘다니는 사람들’만 다니는 곳 같았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대로 기죽지 않고 맘껏 관람하고 나왔다.




관람을 하고 나왔을 때, 어떤 엄청난 감동을 받고 나오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졌다고나 할까? 뭐, 갤러리라는 것의 분위기가 그런 것이어서 그런지는 다른 갤러리를 별로 안 가봐서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음이 그러했다. 내 생각에는, 어쩌면, 그림 속에서 뒷짐 지고 우리나라의 산천을 둘러보며 바람을 쐬고 와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야트막한 산세와 맑은 개울, 그리고 조그마한 움막집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 부부. 우리나라 산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장면이다. 우리 눈에는 너무 흔해서 신경도 쓰지 않던 우리 산천의 아름다운 모습을 작가는 놓치지 않고 화폭에 맑고 정감 있게 담아냈다. 붓 터치도 세세하고 부드럽고 서정적이다. 붓이 제멋대로 가는 듯하지만 적절하다. 청전의 그림을 본다는 것은 청전의 눈으로 아름다운 우리 산천을 둘러보는 것이다. 그래서 청전의 작품을 보고 나서 동네 뒷산으로 바람 쐬고 온 느낌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청전의 그림을 보면서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림 속에서 움막과 사람 찾아내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하는 것 같았다. 거북이 등껍데기 같이 낮게 깔린 지붕, 지게를 진 농부와 물동이를 인 아낙은 산천 속에 어우러져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청전의 작품 대부분이 이런 친근한 산촌을 그리고 있어서 그 그림이 그 그림 같고, 그 제목이 그 제목 같지만 ‘금강산 12승경’은 다른 청전 그림과는 달리 유명한 절경을 그리고 있다. 12승경 하나하나, 아름답고 멋지지 않은 경치가 없었다. 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금강산의 절경을 청전의 그림에서 즐길 수 있었다. 파스텔 톤의 부드럽고 맑은 빛깔과 물결 하나하나, 바위 결 하나하나에 이르는 작가의 세심함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청전의 작품전을 보고 나오니, 소정 변관식의 작품이 보고 싶어졌다. 양대 거장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알고 싶어서이다. 아쉽게도 올해 6월~9월에 한국은행 박물관 개관 기념 전시가 있었다는 데 그것을 놓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소  감  문




6167 변증현






 이번 하계 입영 훈련은 이전의 여러 훈련들과는 사뭇 많이 다른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임관 전의 마지막 훈련이다 보니 그냥 장교 후보생이 아니라 ‘장교 임관’을 앞둔 후보생으로서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사실 그 이전 훈련 받을 때는 사실 장교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훈련을 받았지만 이번 훈련에서는 훈육관님들과 교관님들이 ‘장교 임관’을 앞둔 후보생으로서의 자세를 강조하셔서 ‘과연 나는 얼마나 장교로 임관할 자세가 되어 있는 가’를 스스로 많이 물어보면서 장교를 비로소 피부로 느끼면서 훈련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 새인가 장교로서의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다.




 또 이번에 다른 느낌이 든 것은 훈련내용이 이전과는 다르게 전술과목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었다. 이전 훈련들을 떠올려보면 교수법등 몇몇 과목을 제외하고는 사실 병 기본 훈련과 별 차이가 없는 군 기본 훈련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분소대 공격, 분소대 방어, 중대 전투라는 전술 과목들을 접하면서 분대‧소대‧중대 편제와 공격‧방어의 기본 전술을 익히고 전투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어렴풋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훈련을 다녀와서 전쟁 영화를 몇 편 보았는데 그 전까지 이해되지 않던 부분들이 쉽게 이해되면서 전술과목이 정말 재밌게 느껴졌다.




 병 체험 훈련에 갔을 때, 비록 비 때문에 교육 훈련에는 참가하지 못 했지만, 실제 내무실 생활과 장교님들의 지휘, 교육하는 모습을 보면서 병사들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고 앞으로 내가 야전에 배치되었을 때를 상상해보며 나의 모습을 수정해나갔다. 그리고 병 체험 훈련을 나갔던 중대의 병사들과 간부님들이 정말 친절하고 자상하게 대해주어서 정말로 고마웠다. 도우미와 – 내가 갔던 중대에서는 후보생 한 명에 도우미 한 명을 붙여주어서 같이 행동하게 하였다. – 같이 근무도 서고 밥도 먹고 교육도 받아서 사병들의 생활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또 일과 후에는 간부님들이 후보생들과 차나 간단한 음료를 마시면서 장교 생활에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앞으로 임관하고 나면 병사들과 내무실 생활을 함께 하지 못하게 될텐데, 그런면에서 이런 병 체험 훈련이 비록 1주일이지만, 병사들을 이해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로써 참 중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또 비 오는 날에도 그 비를 다 맞아 가며 소대장님과 병사들과 오랜만에 함께 축구를 실컷 뛰었다. 비록 축구 끝나고 입을 옷이 없어서 고생하긴 했지만 함께 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서 기분이 상쾌했다.




 이제 모든 입영 훈련도 끝나고 몇 달 후면 임관식이 열린다. 그때까지 열심히 장교가 될 준비를 해야겠다. 학과 공부 마무리도 잘 하고 군사학도 열심히 배우고 체력도 다지고 마음다짐도 새롭게 해서 대한민국의 장교로서 소위 계급장을 다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 하여야겠다.


 ‘황금 연못’을 읽고…

 ‘황금 연못’은 5월 중순, 메인주의 한 피서용 별장에 노부부가 도착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어 9월 중순에 별장을 떠나면서 이야기가 끝나는 동안, ‘황금 연못’ 별장에 지내며 거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나타낸 희곡이다. 이 노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노년기의 심리를 에릭슨의 심리 사회적 발달 단계에 기초하여 풀어보도록 한다.




 에릭슨 정성설의 가장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에 들어서면 자아통합과 절망의 갈등이 일어나고 이를 극복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지혜’라는 미덕이다. ‘노년기’ 이전의 7가지 단계에서 획득한 미덕 ( 희망, 의지, 목적, 유능감, 충직성, 사랑, 배려 ) 이 8번째 단계인 ‘노년기’에 들어서 ‘자아통합’이라는 방법을 통해 ‘죽음’이라는 절망을 넘어서 인간의 최종 미덕인 ‘지혜’로 거듭나게 된다. 따라서 미덕들이 절망과 갈등하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노년기의 심리를 알아보자.




 ‘노만’은 올해 황금 연못에서 80세 생일을 맞는 전직 교수이다. 그는 독설과 야구를 좋아하고 부인인 ‘에셀’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미 늙어버린 자신의 노년기를 매우 증오하고 있다. 그의 노년에 대한 증오는 고약한 농담과 삐딱한 태도로 나타나 주위 사람을 괴롭힌다. 그는 이 ‘황금 연못’에 처음 온 날부터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어떻게 죽으면 좋을까,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될까, 내 생에 마지막 피서라는 둥, 꼭 죽음을 바로 코앞에 둔 사람처럼 이야기한다. 이런 노만을 보고 부인 ‘에셀’은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노만은 그것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계속 그런 이야기를 한다. 노만은 그런 노년기에 대한 증오 ― ‘절망’ ― 을 여러 가지로 해결해보려 애쓴다.




 노만의 부인 ‘에셀’은 원기 왕성한 69세 할머니이다. 에셀은 노만과는 달리, 노년기는 아직 오지 않았고 자기는 중년기의 끝자락에 와있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노만과 같은 절망을 느끼지 않고 활기차게 살고 있다. 딸기를 따고, 땔감을 구해오고, 맛있는 음식을 하고… 젊게 살려는 예쁘장한 할머니이다.




 1막 1장에서 노만은 전화가 잘 되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전화 교환수에게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을 한다. 전화는 다른 세상과 연결되는 통로로 이 같은 행동은 황금 연못의 이 별장이 고립 ( 성인기 발달 과제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노만의 욕구 일 것이다. 같은 맥락으로 찰리가 올 때 마다 신문을 받아서 야구 이야기를 하며 세상과 접촉을 시도하는 것 또한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지 않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1막 2장에서 노만은 신문의 구인란을 열심히 살펴본다. 에셀이 듣든 말든,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죽음에 맞서 어떤 일을 함으로써 절망을 이겨보려는 것이다. 그냥 이렇게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다는, 자신의 역할을 찾는 시도이다. 이는 ‘청소년기’의 발달 과제인 ‘정체성과 역할 혼미의 갈등’을 해결해서 ‘충직성’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노만은 에셀의 말대로 딸기를 따러가지만 빈 통을 가지고 돌아온다. 2장의 끝에서 그 이유를 이야기하는데,




 노만 : 딸기밭 옆까지 갔지만 옛길이 어디 있는지 생각나지 않았어… 어찌나 무서운지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막 뛰어 돌아온 거야, 당신한테, 당신의 예쁘장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안전한 곳으로 말이야.




 노만은 늙어서 예전에 하던 일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열등감( 학령기 발달 과제 )에 빠져서 절망한다. 그래서 이를 이기기 위해 에셀이 있는 집으로 뛰어 돌아온다. 친밀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공간, 즉 유아기 발달 과제인 신뢰성 있는 공간으로 가면된다는 ‘희망’을 갖고 집으로 돌아 온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에셀과의 친밀감 ( 성인기 발달 과제 )과 자신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비로소 안심한다.




 1막 1장과 2장에서 노만은 문을 두들기는 사람이 에셀인줄 모르고 에셀을 향해 손님이 왔다고 이야기한다. 이 단순히 늙어서 그렇다고 보기보다는 노만과 에셀의 관계도 어느 정도의 단절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1막 3장에서는 빌와의 대화에서




 노만 : 그래. 대화 자체가 울고 싶을 정도로 지루해서 말이야, 무심코 재미있는 일을 찾게 돼. 자기가 입을 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에 말이야.


 노만 : 에셀과 얘기할 때엔 그렇지 않아. 예쁘지, 그 할망구?


 노만 : 오랫동안 사귀어 왔지만, 아직도 그 할망구가 예뻐 보인단 말야…




 자신이 다른 사람과의 대화가 단절 되어 있음을 이야기하면서, 에셀은 예외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과는 고립되어 있지만 에셀 만큼은 ‘친밀감’이 있다는 것이다. 성인기 덕성인 ‘사랑’을 여기서 확인 할 수 있다.




 2막 1장에서 빌리와 같이 낚시도 하면서 불어도 가르쳐준다. 이는 아직도 내가 가르칠 것이 있다는 것, 즉 자신의 생산성 ( 중년기 발달 과제 )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하는 행동이다.




 1막 3장과 2막 1장을 비교해보면 노만과 첼시의 부녀 관계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막 3장에서는 노만과 첼시의 관계가 부녀 관계라고 보기 어색할 만큼 껄끄럽다. 에셀과는 정말 친밀하게 지내지만 노만과는 굉장히 먼 거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2막 1장에서는 사뭇 관계가 새로워진다. 첼시는 아버지와 적극적인 대화로 이 거리감을 해소하려고 한다. 이는 첼시의 엘렉트라 콤플렉스가 빌과 결혼함으로써 해결된 결과이다.




 노만이 첼시에 대한 시선도 변화한다. 1막 3장에서 첼시가 황금 연못을 처음 방문할 때만 해도 뚱뚱한 꼬마라고 인식을 했지만 빌과 섹스 이야기를 하면서 비로써 성인으로 인정을 한다. 처음에는 의도적으로 빌 얘기에 딴소리를 하지만 결국 딸과의 섹스를 허락하면서 딸을 인정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인 결과, 2막 2장에서




 에셀 : 난 죽음을 보고, 손으로 만지고, 두려워했어요… 그렇지만 정말로 피부로 느낀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그다지 싫지는 않았어요. 마음이 진정되는 듯한, 그다지 징그럽지도 않고 나쁠 것도 없을 듯해요.


 …


 노만 : 내년에 읽을 거야.




 노만과 에셀이 ‘절망’을 극복하고 ‘자아 통합’을 통해 ‘지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에셀은 추상적인 개념이었던 ‘죽음’이 구체적으로 현실화 되자, 당황하지만, 이를 인정하는 자세를 보이고 있고, 노만은 계속 하던 죽음 이야기(노령기의 불만 토로)를 그치고 내년까지 살아서 다시 이 ‘황금 연못’에 오겠다는 삶에 대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동계 입영 훈련을 마치고…




6167 변증현




나는 이번 2학기 방학을 굉장히 늦게 했다. 크리스마스도 지난 12월 27일 방학을 해서 얼마 되지 않아 새해를 맞이하고 또 얼마 안 있어 세 번째로 입영 훈련을 들어갔다. 워낙에 방학을 늦게 한지라, 훈련을 별로 생각을 못했지만 방학과 훈련사이 그 짧은 시간동안 훈련을 걱정하거나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지만 훈련 들어가기 바로 이틀 전, 갑자기 훈련이 걱정되었다. 집체 교육을 받을 때도 그러하지는 않았는데… 여하튼 다음날 훈련 들어갈 준비를 하다보니 더 이상 별 부담 없이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두 번째 동계 훈련이라 지난 기초 군사 훈련을 떠올리면서 목토시, 속장갑 등 방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 하계 훈련 때 필요하다고 느꼈던 물품들 까지 꼼꼼히 챙겨서 들어갔다.


학군교에 들어오니, 3학년들은 구막사를 쓰게 된 것을 알았다. 내무실에 와보니 관물 정리를 하는데 옷을 모두 접어서 보관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불편했다. 세면장이 밖에 있긴 하지만 자리가 신막사보다 많아서 괜찮았다. 빨래도 가까이(복도) 널 수 있다는 것이 편리했다. 25년 된 이 구막사를 우리가 마지막으로 쓰는 것이었다.


입소식을 치룬 첫날, 우리 9중대는 교육 없이 개인 정비 시간이 주어졌다. 교육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부터 독도법으로 시작되었다. 이론 교육 8시간은 졸립기도 했지만 그후 이틀간 이루어진 실습 교육은 흥미로웠다. 특히 하루 종일 표적을 찾아 헤매던 마지막 날이 가장 재미있었다. 야간까지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긴 했지만, 나침반과 지도만으로 표적을 찾는 것이 재미있어서 훈련 끝나고도 해보고 싶다고 생각까지 했었다. 다음 과목은 교수법이었다. 8시간 이론 교육을 받고 12시간동안 육성 지휘를 실습했다. 목청이 맘껏 트이지가 않아 애를 먹었다. 긴장해서 틀리기도 했었다. 그 다음 과목은 K201 유탄 발사기였다. 영화나 게임에서만 보던 유탄 발사기를 직접 분해조립을 하니 신기했다. 비록 목표물은 맞추지 못했지만 인상 깊은 수업이었다. 마지막으로 공수. 나는 하계 훈련 때에도 유격으로 끝나서 목이 망가진 상태로 퇴소했는데 이번 동계 훈련도 공수로 끝나서 2번 훈련 연속 가장 힘든 과목을 맨 마지막에 치루고 종합고사를 치뤘다. 첫날 모형탑에서 뛰어 내릴 때, 방탄모의 똑딱단추가 떨어져서 방탄모를 떨어트렸었다. 다음날 반창고로 똑딱단추를 동여매고, 붕대를 새로 감아서 준비한 결과 두 번째 강하는 잘 됐다. 그런데 교관님이 전날보다 많이 나아졌다면서 한 번 더 타게 하셨다. 그렇게 해서 혼자 두 번을 뛰어내리고 점심을 먹고 종합고사를 보았다. 틈틈이 자율학습시간마다 공부를 해서 무사히 시험 볼 수 있었다.


다음날 퇴소식을 치루고 학군교로 돌아와 퇴소 신고식을 하고 관물 정돈을 하고 그리운 집으로 돌아왔다.


날씨가 별로 춥지를 않아 내복을 거의 입지 않고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눈도 이틀짼가에 잠깐 살짝 내려서 가뿐하게 치웠다. 덕분에 훈련은 잘 받았지만 ‘혹한기’ 훈련은 못받았다. 어쩌면 지난 겨울, 기초 군사 훈련을 강추위와 폭설 속에서 받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겨울에 혹한기 훈련은 다 받은 것이 아닐까?


내무실 동기들이 모두 다 착하고 재미있어서 즐거웠다. 지난 하계 때는 경상도 애들이 많았는데 이번엔 전라도 친구들이 많았다.  이렇게 훈련 들어갈 때마다 팔도 친구들과 사귀게 되는 것이 우리 ROTC입영훈련의 또 다른 맛인 것 같다.

 

후보생 1년을 마치며…




6167 변증현






 기초 군사 훈련으로 시작된 후보생 1년차 생활은 나에게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맛보게 해주었다. 기초 군사 훈련 때, 20년만의 혹한 속에서도 땀흘려가며 기본 제식을 익히고 사격을 하고, 총검술을 배워나갔다. 자다가 추워서 깨기도 하고, 꽁꽁 얼은 손으로 속옷을 손빨래를 해야 했다. 그렇게 우리의 후보생 생활은 시작되었다.




 봄이 오고, 입단식과 개강식을 치룬 우리들은 3월 한달 동안 단복을 입고 학교를 다녔다. 선배, 동기의 얼굴을 익히고 단복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으로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운동한다는 것도 처음엔 너무도 힘들었다. 처음엔 경례하는 것조차도 왜이리 어색했던지… 그러나 시간은 모든 것을 해결해 주었다. 훈육관님들의 지도와 선배님들의 교육 속에서 우리는 민간인에서 후보생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새벽엔 태권도와 체력단련으로 전투력을 유지하고 오후엔 군사학으로 군사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뿐만 아니라 ‘교내 환경 정화 활동’이나 ‘장애인 동반 나들이 활동’ 같은 뜻 깊은 봉사활동도 내 후보생 생활에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후보생들의 최대 축제인 무호제를 맞이하였다. 무호제를 성공적으로 치루기 위해 많은 준비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러나 무호제를 성공적으로 치루고 난 뒤에는 준비하는 동안 흘려왔던 땀방울이 시원한 청량제가 되어 내 머리로 쏟아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현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 참배를 가서 선배 장군님이신 이영대 장군님의 묘소에 참배를 하고 왔다. 그렇게 후보생의 첫 학기가 지나갔다.




 우리 학교는 하계훈련을 2차로 들어가게 되었다. 1차로 다녀온 4명의 동기가 부럽기도 했지만 우리는 군장 검사를 하고 친구, 가족들에게 잠시동안의 작별을 고하고 학군교로 향했다. 우리 중대는 각개전투, 화생방으로 시작해서 유격, 행군으로 모든 훈련이 끝났다. 위장한 채로 CS복을 입고 비온 뒤 흙탕물에서 뒹구는 것으로 하계 훈련 첫날이 지나갔다. 훈련 초기에는 비가 계속 오고 개지를 않아서 빨래가 큰 걱정이었다. 나중에 화생방 훈련받을 때는 땡볕에서 고생했지만. 유격과 행군으로 지친 몸을 가지고도 우리는 다음날 체육 대회 때 쉴 대로 쉰 목을 가지고 목청껏 응원을 했다. 축구를 결승까지 가서 탈락한 것이 가장 안타깝고 분했다. 밤에 후보생들 장기자랑을 보면서 하나되는 ROTC의 모습을 보면서 후보생 기간의 하이라이트인 나의 3학년 하계훈련은 끝이 났다.




 2학기가 시작하고, 우리는 3년만에 열리는 연∙고 ROTC 체육대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필승, 전승, 압승의 의지로 우리 후보생들은 정말 열심히 연습, 아니 훈련을 했다. 결과는 헛되지 않아서, 자유투 게임이었던 농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승리했다. 그날 오후에 먹던 도시락은 왜 그리도 맛있던지… 2학기에도 봉사활동은 계속되었다. 후보생들의 대부분이 헌혈 행사에 참여하여 사랑을 나누었고 장애인 동반 등반 대회도 뜻 깊은 행사였다. 대부분의 예정되어 있던 행사가 끝난 지금. 우리는 한달 남짓 2학기 후보생 생활을 남겨 놓고 있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보니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참 하나하나 아쉬울 것 없는, 알찬 시간들로 나의 후보생 1년이 채워진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장애인 동반 나들이

 나는 어렸을 때부터 TV에서 봉사 활동하는 것을 볼 때마다 나도 언젠가 저렇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하며 아름답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한번도 해보지 못한 일을 나 홀로 뛰어들기엔 부담이 커서 ‘나중에 해야지…’ 하며 차일피일 미뤄왔다. 봉사활동을 할 만한 기회나 계기가 나에게는 별로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몇 번 하던 헌혈도 대학 와서는 바쁘다는 핑계로 한번도 하지 못했다. 이런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주어졌다. 5월 12일 성북 구청에서 주최하는 장애인 바깥 나들이 행사에 우리 102 학군단이 참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성북 구청 앞에서 모여 차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차에 올라타고 처음 장애인 분들을 만났다. 선생님들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고 차는 출발했다. 과천까지 가는 동안 장애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말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굉장히 수줍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착해서 입장을 기다리는 동안, 많은 분들이 화장실을 이용했는데 화장실은 2명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아서 많이 불편했다. 입장을 해서 나는 내 파트너(정신 지체)와 함께 놀이 기구를 타며 놀았다. 나도 오랜만에 타보는 놀이 기구라서 즐거웠지만 내 파트너는 놀이 기구를 타는 것을 무서워하면서도 너무 재미있어 했다. 우리는 손을 꼬옥 잡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경을 했다.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약속 장소에 너무 늦게 도착했다. 모인 것을 확인하고는 점심을 먹으러 잔디밭으로 향했다. 그곳엔 점심이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내 파트너 짐심까지 타와서 같이 먹었다. 누군가를 책임지고 위한다는 것. 어쩌면 나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소중한 경험인 것 같다. 이래서 봉사활동이 힘들고도 보람찬 것인 가… 하는 생각도 했다. 뒷정리도 깨끗이 하고 이번엔 동물원으로 향했다. 나는 동물원에도 오랜만에 오는 거라서 구경을 열심히 했지만 내 파트너는 아쉽게도 동물을 별로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간 날이 오랜만에 화창하게 맑을 날이어서 바깥 나들이하기에는 좋았지만 걷기도 많이 하고 해서 조금 더웠다. 나와 내 파트너는 음료수를 사먹었다. 내 파트너는 선생님과 친구들 것까지 챙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우리는 돌고래 쇼를 재밌게 보았다. 특히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돌고래 쇼였다. 쇼가 끝나고 돌아올 때에 장애인들을 부축하는 우리 후보생들의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 이렇게 해서 모든 일정이 끝나고 우리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언제 그렇게 친해졌는지 장애인분들은 이별을 매우 아쉬워하였다. 서로 연락처를 주고 받고, 그렇게 우리는 짧은 만남을 마무리 지었다.


 단 하루 동반 나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첫째로 내가 제대로 해보는 첫 봉사 활동으로 봉사 활동의 의의를 느낄 수 있었고, 둘째로 장애인들과 직접 만나서 대화하면서 장애인분들에 대한 인식을 올바로 할 수 있었고, 셋째로 봉사 활동을 하면서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의 계기도 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정말 뜻 깊은 하루였다. 이런 기회를 주신 단장님께 감사를 드리며 이런 행사가 종종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현장확인, 겸재정선의 300년전 한강’을 보고…






진경산수화의 대가 겸재정선은 그의 작품집 정교명승첩 32개의 그림 중에 20개는 한강의 풍경을 그려 넣었다. 이전 시기 화가들이 중국의 산수를 그리는 관념 산수화를 주로 그리는데 비해, 겸재는 한강, 금강산 등 우리나라의 풍경을 사실보다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진경산수화를 그려냈다. 녹운단에서 시작해서 낙전정까지, 겸재는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한강의 모습을 우리 후손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진경산수화.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나라 산천을 그린 이 진경산수화는 18세기에 나타났다. 후금이 명을 누르고 청을 건국하면서 우리 조선은 명 대신 성리학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진경 문화를 꽃 피웠다. 정조시대에 그 꽃을 피우는 진경문화는 사상, 문학 등 사회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다만, 이 훌륭한 문화를 우리 후손들이 바르게 이어 받지 못하고 어느새 이젠 중국이 아닌 서양의 나라들을 흉내내고 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한강의 아름다운 풍경, 특히 양천은 중국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올 때 ‘양천을 못 봤다면 조선을 구경한 것이라 말하지 말라.’고 말할 정도로 빼어난 풍광을 지니고 있었으나 무분별한 개발로 그 빼어난 풍광 흔적조차 찾기 힘들어졌다. 이는 양천뿐 아니라 한강줄기 따라 늘어섰던 수많은 정자들, 기와별장들도 이제는 위치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대신 시멘트로 만들어진 회색 건물들만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앞으로 분별없는 계획으로 훌륭한 문화적 자산을 없애버리는 시대적 착오는 없어야 한다. 오히려 그것들을 잘 보존해서 영국이나 프랑스처럼 관광자원으로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일 것이다.


진경 문화. 우리 나라 역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때가 아니었나한다. 우리도 원숭이 흉내내듯 다른 나라 따라가기에 급급하지 말고, 우리 나름대로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독특하고 고유한 ‘우리’의 문화를 꽃피우는, 제2의 진경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안동 하회 마을을 다녀와서


6167 변증현




2000년 5월. 왠지 학교 생활이 지루하고, 놀던 것도 싫증났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 녀석 둘하고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때마침 학교 축제기간이라 수업도 걱정이 안됐다. 그저 서울을 떠나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목적지는 청량리역에서 결정하기로 하고 날짜와 시간, 준비물, 돈만 결정해서 모였다. 갈만한 데를 찾아봤지만 청량리역은 대부분 강원도 춘천행 열차였다. 청평, 가평, 강촌 M.T촌은 지겨운지라, 다른 도(道)행을 찾아 봤더니 ‘안동’행이 시간과 표 값이 적당하다 싶어서 안동으로 가기로 했다.




막상 도착해보니 도시 한가운데라, 서울을 떠나온 보람이 없었다. 이미 해는 져서 이동하기도 힘들 것 같아 굶주린 배를 채우고 여관을 잡았다. 생각보다는 싸게 잡았다. 여관에 들어와 보니 또 마땅히 할 게 없어, 밖으로 나갔다. 노래방에서 소리 좀 지르다가 게임방에서 게임도 좀 했다. 시세는 서울과 똑같았다. ‘비싸게 여관을 잡지 말고 게임방에서 밤을 샐 걸…’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술과 안주를 사 가지고 들어가 간단히 한 잔씩하고 다음 날을 위해 잠이 들었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다다를 때 즈음, 우리는 깨었다. 여관을 나와 갈 곳을 생각해보니 ‘안동’하면 ‘하회마을’ 밖에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하회마을’에 가기로 했다. 교통 수단은? 당연히 도보였다. 시간도 많겠다, ‘안동 하회 마을’ 이니 그다지 멀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착각이었다. 하회마을 가는 길은 기나긴 여정이었다. 산업용 도로인지 널다랗게 뚫린 길에는 트럭이 옆으로 쉥~쉥~ 지나갔다. 때는 5월. 날이 점점 더워지는 때인지라 아스팔트 길은 마치 초여름처럼 더웠다. 우리는 물에 준비한 소금까지 타 마셔가며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내 발이 고장 나고야 말았다. 물집이 잡힌 것이었다. 다행이 손님이 없는 병원이 길가에 있어서 마음씨 좋은 아저씨에게 공짜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물도 채우고 화장실도 다녀오고 다시 출발했다. 가는 길에 안동 과학 기술 대학(?)인가도 지나쳐왔다. 도무지 금방 나올 것만 같은 하회마을은 절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워낙에 늦게 출발한 터라, 입장 시간에 늦을 것 같아서 우리는 도보로 간다는 계획을 수정하여, 트럭을 얻어 타고 버스 정류장까지 간 다음에 버스를 타고 하회마을을 향했다. 그러나 이미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리고 있었으니… 우리는 하는 수 없이 하회마을 조금 앞에서 내려 하회마을을 휘돌아 가는 강물에 돌을 던지고 놀다가 ‘헛제사밥’이라는 먹거리도 먹어보고 숙소를 잡았다. 밤바람이나 쐴 겸 나와보니 ‘장승 마을’(?)인가하는 것이 있어서 장승 구경도하고 널도 뛰어보고 놀다가 숙소로 돌아와 ‘안동 소주’를 ‘감자전’과 ‘고기 산적’을 안주 삼아 깨끗하게 비우고 피곤한 하루를 마쳤다.




마지막 날, 약간 느지막히 일어나 하회마을 구경에 나섰다. 여기저기서 사진도 찍고… 출출해서 육개장도 사먹고… 구수한 인심이 젊은 나그네들을 반겼다.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하고… 마침 그 즈음이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 1주년인가로 전시 같은 것을 많이 했다. 서울로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버스에 몸을 싣고 기차역으로 왔다. 그리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했다.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를 읽고…


고등학교 때 국어 공부를 하면서 김수영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왠지 그 시들이 맘에 들어 태어나 처음으로 시집을 사서 읽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들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몇몇 고등학교 참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풀>, <폭포>, <눈>, <푸른 하늘을> 등의 시를 제외하고는, 아직 시적 감각이 없는지, 몇 번을 읽어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알고 있는 만큼, 느낀 만큼만 어렴풋이 이야기하자면, 먼저 그의 으뜸 가는 주제는 ‘자유’이다. ‘자유’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그리고 억압받는 ‘자유’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작가 자신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특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한다.(<강가에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렇게 자조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미 유명해진 <풀>, <눈>, <폭포>, <푸른 하늘을> 같은 시에서는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 그는 모더니즘 시인이다. 모더니즘은 <봉건적 요소>와 <감상주의>에서 탈피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따라서 비시적(非詩的)요소와 현대문명을 과감하게 도입한다. 이러한 모더니즘 요소가 그의 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시집의 제목으로 나온 ‘거대한 뿌리’라는 시를 살펴보면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이후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시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아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연은 전혀 이해가 안가지만, 작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보이고 나아가 ‘거대한 뿌리’ 라고 표현하고 있는 조국에 애정이 깊은 것 같다. 이념, 겉치레, 껍데기, 불행한 역사의 유물, 외세를 배격하고 전통과 사회적 약자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단정적이 어조를 씀으로써 담담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시는 가슴으로 느껴야한다는데 이해를 못하니까 음미할 수가 없었다. 시를 즐기고는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할지… 시를 이해할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어려운 시집을 고른 것일까?


<풀>, <눈>, <폭포>, <푸른 하늘을>에 담겨진 작가의 역사의식이 좋아서 김수영 시집을 구입하였지만 그밖에는 마음에 드는 시를 찾지 못했다. 역시 너무 어려워서 인가? 아무래도 다독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

 

향    수




정 지 용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 시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줍던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밤하늘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나는 태어나서 줄곧 서울에서만 자라서 이 시에서와 같은 고향 – 향수 – 가 없다. 그래서 이 시에 나온 풍경들, 평화롭고 단란한 농촌의 모습들을 동경하기도 한다. 너무나 평화롭고 한적하고 조용하고 정직해 보이는 농촌 생활이 바쁘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경쟁적인 도시 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겐 영원한 휴식처- 그 이름하여 고향 -이다. 때론 나도 이 도시를 떠나 농촌에서 소박하게 사는 꿈을 꾸어 본다.

그 날이 오면

심   훈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 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 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이 2연 밖에 안 되는 심훈의 시를 나는 가장 좋아한다. 물론 이 시 말고도 아름다운 시, 감동적인 시들이 많지만 처음 읽는 순간, 가슴속에 절절히 스며드는 시는 이 시밖에는 없었다. 분량도 짧지만 내용도 간단하다. 필자는 ‘그 날’이 오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그냥 소원하는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죽도록’ 바라고 있다. ‘그 날’이 오기만 한다면 필자는 얼마든지 죽어도 좋다. 종로의 인경을 머리가 깨지도록 들이받아 울려도, 가죽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도, ‘그 날’. ‘그 날’이 오기만 하량이면 기뻐서, 여한 없이 눈을 감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 날’에 대한 염원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치열하다 못해 전율을 느끼게 해준다. 일신의 생사는 돌보지 않는 염원… 이는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벅찬 감동을 느끼도록 만든다. 소외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일신의 희생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 나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전태일이 생각났다. 필자의 ‘그 날’은 조국 광복이었겠지만, 전태일의 ‘그 날’은 노동자들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의, 우리 겨레의 ‘그 날’은 아마도 조국통일의 ‘그 날’일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문제들은 모두 남북분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반세기 동안, 금수강산이 허리가 잘린 채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신음하여 왔는가? 통일의 ‘그 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의 문제점



근래에 들어서 ‘인터넷’으로 대변되는 세계화 열풍이 온 세계를 휩쓸고 있다. 과거 대부분의 경제, 문화, 사회 등의 활동이 한 국가 내에서 이루어진 반면, 현대 사회는 거의 모든 활동이 국제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만큼, 외국인들과의 언어 소통이 중요해지고 있다. 우리가 접하는 외국인 중에 많은 수가 로마자를 쓰는 아메리카나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므로 그들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한글과 그들이 쓰는 로마자를 연결해 주는 규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과거 문교부에서 84년, 86년에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을 각각 새로 제정,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로마자 표기법과 외래어 표기법에는 문제가 있다.




현재 외래어 표기법의 원칙은 ‘되도록 현지어 발음에 가깝게 표기한다.’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대문호 ‘푸슈킨’의 경우,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 의하면 ‘푸슈킨’이 옳으나, 몇몇 출판사들은 현지음과는 거리가 있다며 ‘뿌쉬낀’을 고집하고 있다. 현행 외래어 표기법에는, ‘파열음 표기에는 된소리를 쓰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고 제4항에 명시 되어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뿌쉬킨’이 아니라 ‘푸슈킨’이여야 하지만, ‘되도록 현지어 발음에 가깝게’ 라는 대원칙에 맞게 표현하려면 ‘뿌쉬킨’이여야 한다. 이것은 외래어 표기법 내에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


브라질 화폐 단위인 ‘Real’도 같은 경우이다. 옛 스페인의 화폐단위에서 생겨난 이 말은 포르투갈어를 자국어로 쓰고 있는 브라질 현지 발음으로는 ‘헤알’과 비슷하지만 국립 국어 연구원이 발간한 외래어 표기 용례집에 따르면 ‘레알’로 표기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또 지난 97년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마련한 표기법도 ‘레알’로 쓰도록 권고하고 있다. 원래 포르투갈어에서 단어 첫머리에 오는 ‘r’은 우리말 발음의 ‘ㅎ’에 가깝게 소리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라질의 축구 선수 ‘Ronaldo’를 ‘호나우도’라고 발음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왜 ‘Real’은 ‘레알’이고 ‘Ronaldo’는 ‘호나우도’인가? 그것은 ‘Real’의 경우에는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가 심사를 거쳐 ‘레알’로 승인했기 때문이고 ‘Ronaldo’와 같은 사람이름의 경우엔 일일이 규정을 만들 수 없어 현지 발음에 충실하게 표기한다는 원칙에 의해 ‘호나우도’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의 통화 단위인 ‘위안’도 현지에서는 ‘위앤’으로 발음하고 있어서 표기와 발음간의 차이가 있다.


굳이 이런 예를 들지 않아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영어 단어들도 현지 발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라디오, 비아그라도 현지인들은 래디오, 바이애그라로 발음하고 있다. 이는 심의위에서 발음보다는 영어 스펠링을 기준으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 나라 말에는 /f/와 /v/, /θ/ 발음이 없고, /r/과 /l/이 구분이 힘들기 때문에 File과 Pile을 똑같이 ‘파일’이라고 발음하고, Fax와 Pax를 똑같이 ‘팩스’라고 발음한다. 또, Bolt와 Volt, Right와 Light는 각기 ‘볼트’, ‘라이트’로 밖에 쓸 수 없어 대화할 때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택동을 ‘마오쩌둥’으로도 쓰고 있고, 손문을 ‘쑨원’으로도 쓰고 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된소리를 쓰지 않도록 규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게다가 ‘순경음 ㅍ’(/f/)과 ‘순경음 ㅂ’(/v/), /θ/, /r/ 등을 표시할 새로운 문자를 도입하는 것도 정확한 음가 표현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외래어 표기법의 취지가 외래어를 한글로 충실하게 표현하자고 제정된 것이므로 현지 발음을 최대한 반영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한다.


외래어 표기법에 관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국립 국어 연구원과 외래어 심의 위원회는 외래어 사용이 빈번해지는 세계화 시대라는 점을 의식해 이러한 실제 발음과 표기상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정확한 표기에 노력해야 할 것이며, 너무 현실에 얽매여 낡은 외래어 표기법을 고수하려고 하지만 말고 혼란이 예상되더라도 필요에 따라 개정을 함으로써 국민들의 언어 생활에 혼란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남의 말을 한글로 표시하는 외래어 표기법에도 문제가 있지만 우리말을 로마자로 나타날 때 쓰는 로마자 표기법에도 고쳐져야 할 점이 있다. 현재 전국 도로 표지판과 지하철 안내판에 모음 앞에서의 여린소리/ㄱ, ㄷ, ㅂ, ㅈ/은 /k, t, p, ch/로 표기되어 있다. /k, t, p, ch/의 발음이 /ㄱ, ㄷ, ㅂ, ㅈ/인가? 영어에서 /k, t, p, ch/는 거센소리/ㅋ, ㅌ, ㅍ, ㅊ/로 소리 난다. 따라서 영어 교육을 받아 온 대부분의 한국인으로서는 /k, t, p, ch/를 /ㅋ, ㅌ, ㅍ, ㅊ/로 밖에 읽을 수 없다. /k, t, p, ch/가 /ㄱ, ㄷ, ㅂ, ㅈ/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ㅋ, ㅌ, ㅍ, ㅊ/는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가? /k’, t’, p’, ch’/가 그 답이다. /k, t, p, ch/에다가 ‘ ’ ’(어깨점)을 붙인 것이다. 그러나 로마자 표기법 제8항에 의하면 “인쇄나 타자의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의미의 혼동을 초래하지 않을 경우 ŏ, ŭ, yŏ, ŭi 등의 ‘ ˘ ’(반달표)와 /k’, t’, p’, ch’/ 들의 ‘ ’ ’(어깨점)을 생략할 수 있다.”라고 명기되어 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 ’ ’(어깨점)이 없어도 발음하는데 불편을 느끼지 못하므로 (ex: t’al, tal 둘 다 ‘탈’로 읽을 수 있다.) ‘ ’ ’(어깨점)을 생략한다. 그러면 ‘공’도 ‘kong’이고 ‘콩’도 ‘kong’이다. ‘달’도 ‘tal’이고, ‘탈’도 ‘tal’이 된다. ‘발, 팔’ 모두 ‘pal’이고, ‘장녀’와 ‘창녀’의 구분도 사라진다. /k’, k/는 각각 /ㅋ, ㄱ/인데 ‘ ’ ’(어깨점)이 빠지면 어떻게 의미의 혼동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tch/를 ‘ㅉ’로 읽을 사람이 우리 나라에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일반 국민들은 /ㄷ, ㄸ, ㅌ/을 /d, dd, t/로 알고 있는데 반해, 로마자 표기법은 /t, tt, t’/로 정해져 있어 같은 단어 ‘tal’을 두고 ‘동상이몽’이 되기 일쑤이다.


모음의 경우에도 ‘ ˘ ’(반달표)의 사회적 인식이 매우 낮기 때문에 /ŏ, ŭ, yŏ, ŭi/ 등의 발음을 올바로 실행하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어떤 외국인이 우리 나라에 들려서 신천(Shinch’ŏn)에 가려고 하는데 신촌(Shinch’on) 표시판을 보고 내릴 수도 있지 않은가? 모음에서 가장 쟁점이 되는 문제는 /ㅓ/와 /ㅡ/의 표현인데, 이 글자들은 세계에 유례가 드문 글자이면서 독특한 소리를 나타내므로 어떤 약속기호를 잘 정해서 이를 지속적으로 세계에 알리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 나라 처음 규정인 ‘조선어음 로마자 표기법’(1940)에서 /ㅓ/소리는 eo로, /ㅡ/소리는 eu로 약속기호가 정해져 벌써 60년 가까이 알려져 있으니 이를 따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물론 eo도 /ㅓ/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o는 /ㅗ/, u는 /ㅜ/를 표현하는데 주를 두고 있고, ŏ는 일반인들의 인식이 낮고 인쇄상의 효율성이 떨어지므로 굳이 고집할 근거가 없을 것 같고 eo를 /ㅓ/ 발음으로 약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사실은 /eo, o, u, ŏ/ 그 어느 그 어느 것도 /ㅓ/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없다. (다른 나라에 없는 발음이므로) eu(/ㅡ/)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eu, u, ŭ/ 모두 /ㅡ/를 정확하게 나타내는 것이 아니므로 혼동을 피할 수 있는 eu로 표기해야 할 것이다.


다행히도, 1999년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이 개정되어 이런 문제들을 많이 해결하였다. 모음 앞에서의 /ㄱ, ㄷ, ㅂ, ㅈ/는 각각 /g, d, b, j/로 개정되었다. /ㅓ, ㅡ/는 /eo, eu/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파열음에서 경음이 바뀌지 않은 것은 안타깝다. 많은 사람들이 딸기를 ‘ddalgi’로 쓰고 있는데 말이다.


이 개정안이 실행되는 과정은 매우 험난할 것 같다. 많은 지방 자치 단체들이 이 개정안을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까지 써온 로마자 표기를 모두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표지판, 터미널 등 많은 교체비용이 들것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더욱 반대가 심한 것은 통신업체들이다. 인터넷상에서 웹사이트 주소는 업체들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개정안이 발표되면서 하루아침에 고생해서 확보해


놓은 웹사이트 주소가 무용지물이 되니 그들의 반대는 심할 수밖에 없다. 또 김치,


          로마자 표기법 개정안 (1999)


자     음































































































한글


로마자


종전


현행



a


a



ŏ


eo



o


o



u


u



ŭ


eu



i


i



ae


ae



e


e



oe


oe



wi


wi



ya


ya




yeo



yo


yo



yu


yu



yae


yae



ye


ye



wa


wa



wo


wo



wae


wae



we


we



ŭi


ui


        모      음























































































한글


로마자


종전


현행



k/g


g/k



kk


kk



k’


k



t/d


d/t



tt


tt



t’


t



p/b


b/p



pp


pp



p’


p



ch


j



tch


jj



ch’


ch



s


s



ss


ss



h


h



zero/ng


zero/ng



n


n



m


m



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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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음에서 ‘ / ’ 앞은 모음 앞일 때, ‘ / ’ 뒤는 그밖에 경우)




불고기, 갈비 등 우리 나라의 전통 음식 이름도 수출과 관련해 혼란에 빠졌다. 김치의 경우, 지금까지 kimchi라는 이름으로 수출해 왔는데, 개정안에 따라 gimchi로


바뀌면 수출에 큰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김치, 부산, 김포공항 등, 모두 바꿔야 하지만 거센 반발에 주춤하고 있는 상황이다. 얼마 전(2000년) 종로3가에서 안내판을 새로 가는 공사를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새 로마자 표기법 때문에 바꾸나 했더니 로마자 표기가 종전과 다름없는 Chongno- sam(3)-ga였다. Jongno-sam(3)-ga를 기대했던 나는 큰 실망을 하고 말았다. 어렵더라도 국립 국어 연구원에서 큰 마음 먹고 개정한 것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따라주어야 한다. 물론 당장 교체 비용과 손실이 예상되나 잘못된 것은 고쳐져야 할 것이 아닌가? 중국의 수도 Beijing도 과거에는 Peijing이였다고 한다. 어차피 우리말을 로마자로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최대한 현실 생활에 알맞게 표기법을 제정해야 할 것이고, 이런 측면에서 이번 개정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정부는 이번 로마자 표기법을 널리 시행해서 더 이상 언어 생활에 혼란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전 태 일  평 전  조영래 지음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 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스로 몸을 불사른 청년. 22살의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젊은이. 그는 왜 죽어야만 했던가?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쳤는가? 이런 질문을 풀려면 우리는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이 활동했던 시대는 1960년대 말과 1970년 까지이다. 이 시대는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운동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시대로써, 우리 나라의 모든 산업이 발달해 나가던 때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농지는 공장이 되고, 새로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고, 전태일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은 약속된 땅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도 거의 실업자로 지냈고, 어머니는 식모살이, 날품팔이로 겨우 겨우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독한 가난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일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학교 공부도 그만두고, 공장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간 곳이 평화 시장 옷 공장이었다. 태일은 그 곳에서 노동 지옥을 목격하게 된다.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1평에 4명이 일해야하는 좁은 작업장,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일당, 어두운 조명, 엄청난 먼지, 화학 약품 냄새, 허리를 필 수 없는 다락방, 2천명이 함께 쓰는 3개의 변소. 이러한 작업 환경으로 말미암아 5년 정도 평화 시장에서 일하고 나면 영양 실조와 소화불량,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류머티즘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이건 품팔이가 아니라 피팔이였다.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노동 지옥을 보면서 태일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런 법이 있다는 얘길 들은 태일은 없는 돈에 근로기준법 책을 사서 그 어려운 법률 책을 독파해 나갔다. 그 때부터 외롭고 처절한 태일의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고 정부 당국에 이러한 실상을 고발하고 사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토록 믿었던 근로 감독관과 노동청에게 실망한 태일은 이러한 활동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맘을 먹고 다시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태일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투쟁. 또 투쟁. 그러나 사회라는 벽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미 생명까지 바치기로 맘먹은 태일은 이 두껍고도 두꺼운 사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1970년 11월 13일 2시경,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태일은 길거리로 뛰어들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말라!’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고 숯덩이가 되어가는 태일을 구하러 온 친구들에게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지막 구호를 외치고 10시경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죽어 가는 작은 생명들에 대한 사랑, 사회라는 거대 조직에 대항할 수 있었던 그 용기,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지탱해준 의지. 이것들이야말로 청년 열사 전태일의 정수였다.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에게 평화 시장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노동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것이다. 그 이후로 노동운동은 계속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태일. 22살의 그 젊디 젊은 나이에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 그는 영원히 한국 노동운동의 지표가 될 것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를 읽고…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먼저 접했다. 그리고 몇몇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책을 구해서 읽었는데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로 모두 접하니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먼저 영화를 볼 때는, 부담이 없고 줄거리 이해가 쉽고 구체적인 시각적 장면을 제시해주어서 기억하기 쉬웠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은 놓치기가 쉽고 시각적 장면이 자유로운 상상을 방해할 수도 있다. 그런 부족한 부분을 책이 보충해 주는 것 같다. 비록 영화가 소설이 되거나 소설이 영화화 될 때, 각색된 부분이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큰 틀은 변하지 않으므로 이해하는데 어려움은 없으리라 본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경우, 소설을 영화화한 경우인데, 소설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서 원작에 없는 부분(문방구 날리기 등)을 첨가하고 미장셴을 깔끔하게 해서 완성도를 높인 것 같다. 그리고 원작보다 감동을 더욱 불러 일으킬만한 구성으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준다. 원작보다 영화를 먼저 접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원작보다는 영화를 권하고 싶다.




‘죽은 시인의 사회(Dead poet`s society)’는 1959년, 미국 동부의 웰튼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키팅이라는 새 국어 선생님이 부임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이 웰튼 아카데미 고등학교는 사립 대학 진학 예비교로써 역사와 전통이 매우 깊고 우수한 졸업생들을 많이 배출한 이른바, ‘명문’ 고등학교이다. 명문 고등학교인 만큼, 학생들 또한 ‘귀한 집 도련님’들이다. 이 도련님들은 품위를 지키며, 너무도 어른스럽게 행동하고, 감정을 절제한다. 그리고 이 시대는 ‘비틀즈 혁명’이전으로써 학생들은 그들의 주장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없었다. 아버지나 선생님 등, 절대적인 권위를 지닌 기성세대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엔 자기주장을 내세우면 곧 ‘불량아’로 찍히기 마련이었다. 학생들은 그저 아버지가 짜놓은 인생 계획표대로 살아가야만 했다.


‘죽은 시인의 사회’는 그러한 특수한 환경, 특수한 상황 속에서, 소년들이 한 사람의 이상적인 교사, 존 키팅을 만남으로써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고,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말, 자신의 시로 표현하는 기쁨에 눈 떠가는 성장의 이야기이다. 존 키팅은 학생들에게 스스로를 해방시킬 것을 요구한다. 숨막힐 것 같은 교칙,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주위의 과잉기대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 ‘생의 정수’를 즐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또 시를 머리로 이해하기보다는 가슴으로 느끼며 진정으로 음미하는 황홀함을 가르친다. 그리고 그 자신은 학생들을 그러한 자유에로의 항로로 항해하게 하는 선장임을 자처한다.


학생들은 이 정열적인 선생을 만남으로써 그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새로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황홀한 자유에 조금씩, 조금씩 접근해간다. 그러한 접근 과정에서 그들은 당황하고, 고민하고, 불안해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회원들은 밤에 학교를 나가 동굴에서 자기가 쓴, 자기의 주장이 들어간 자신의 시를 자기의 목소리로 낭송하고 음미한다. 그러면서 자기표현의 즐거움을 만끽한다. 반항은 꿈도 못 꾸던 우등생인 닐 페리가 아버지가 반대하는 연극을 하고, 찰리 달튼은 학교에 남녀공학을 하자는 글을 쓰고, 녹스 오버스트릿은 사랑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시대는 그러한 자유를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너무나도 보수적 상황에서 키팅은 너무도 급진적인 자유를 내세웠다. 결국 학생들의 자유를 향한 열정은 학교라는 억압체제에 짓눌리고 만다. 아버지의 말을 어기고 연극을 한 닐 페리는 절망한 나머지 자살을 하고 키팅은 학교에서 쫓겨나고 나머지 학생들은 굴욕적인 서명을 강요받는다. 자유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만큼, 학교로의 전향은 굴욕적일 수밖에 없다.






영화에서 키팅을 배웅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눈물을 흘리지 아니 할 수가 없다. 누구보다도 여성스럽고 심약하던 토드 앤더슨이 용감하게 교장 선생님 앞에서 존 키팅 선생님을 배웅하기 위해 책상위로 올라서는 그 장면에는 사라져 가는 선장에 대한 아쉬움과 존경, 전향에 대한 사죄, 그리고 억압적인 체제에 대한 단호한 거부가 드러나 있다. 이러한 굳건한 모습에 우리는 감동 받을 수밖에 없다.




이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토드 앤더슨이다. 토드는 입학할 때부터 그 학교 우수 졸업생인 형의 영향으로 너무도 큰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어렸을 때부터 형 때문에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서 심약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키팅 선생님을 만나, 시를 쓰고, 소리를 지르고, 책상에 오르고 하는 사이에 마지막 ‘죽은 시인들의 사회’모임에서는 멋진 시를 낭독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토드 앤더슨이야말로 키팅 선생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고 성격 변화가 가장 심했기 때문에, 토드 앤더슨의 변화를 보면 키팅 선생님의 교육을 가장 잘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자유에의 동경은, 특수한 환경, 특수한 시대를 뛰어 넘어, 일반성을 갖는다. 자유가 억압되는 곳은 어느 환경, 어느 시대에나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고등학생 이야기 일 수도 있다. 또, 바로 우리의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카르페 디엠(오늘을 즐기라.), ‘생의 정수를 즐기라’ 는 키팅의 이야기는 결코 헛된 이야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도 시를 가슴으로 음미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영어 교육의 문제점과 대책




우리 나라 학생들은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혹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6년 내지는 10년 동안 영어 교육을 받는다.  이 정도로 오랫동안 한 과목을 배운다면, 그 과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랫동안 영어 교육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대학생들은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의 대화를 매우 어려워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어느 TV 프로에서는 외국인을 시켜서 학생들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하는 코너를 마련했다.  그 프로에 나오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유창하게 아니, 유창하지 않더라도 마음껏 대화를 나눈 학생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영어 실력을 검사하는 시험인 TOEFL 이나 TOEIC 점수를 볼 때, 우리 나라 학생들의 성적은 매우 낮은 순위에 올라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로 볼 때, 지금의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은 크게 문제가 있다고 하겠다.  과연 지금의 영어 교육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또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 나라 영어 교육에 첫 번째 문제점은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이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입시 전쟁이란 말로 대변되는 대학 입학 경쟁이 지금의 교육 정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우리 나라만의 특수성의 영향으로, 영어 교육이 외국어 능력을 학생들에게 함양시켜서 국제화, 세계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는 본래의 취지와는 달리, 대학 입시를 위한, 점수를 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인식되고 있지 않는 것에 현재 영어 교육의 문제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근시안적인 영어 교육으로 말미암아 영어를 10년이나 배우고도 말 한마디 못하는 대학생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영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Reading, Listening 위주의 해석 영어이다. 해석 영어는 말 그대로 남의 이야기를 읽고, 또는 듣고 그 뜻을 이해하는 ‘해석’ 위주의 영어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Speaking, Writing 위주의 작문 영어이다. 작문 영어도 말 그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을 하거나 씀으로써 남에게 정확하게 전달시키는 ‘작문’ 위주의 영어이다.


해석 영어와 작문 영어, 이 두 가지 영어는 서로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두 명이 대화를 한다고 할 때, 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작문 영어를 하는 것이고 듣는 사람은 해석 영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고, 책이 있다고 할 때, 책을 쓴 사람은 작문 영어를 한 것이고 읽는 사람은 해석 영어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문 영어와 해석영어는 긴밀한 관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영어에 모두 능통해야만 ‘영어에 유창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은 해석 영어만을 강요한다. 우리 나라의 비정상적인 영어 교육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시험 위주의 영어 교육이다 보니 평가가 아무래도 큰 몫을 차지하게 된다. 해석 영어는 글을 주거나 또는 대화를 듣게 해서 올바로 이해했는지, 아닌 지만을 확인하면 평가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다. 현재 대부분의 영어 시험이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작문 영어는 뚜렷한 평가 기준을 갖추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에 평가의 객관성이 보장되지를 않는다. 평가 기준이 뚜렷하다고 하더라도 작문 영어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에 채점하기가 매우 어렵다. 수능에도 말하기 문항이 있기는 하지만 객관식이기 때문에 작문 실력 향상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는 보통 한 교사가 현재 50여명의 학생을 데리고 수업을 한다. 그러다 보니 작문 영어 교육에서는 필수적인 ‘대화’가 이루어지지를 않는다. 따라서 작문 영어 실력이 늘어날 기회가 없다. 대신, 단순 주입식의 해석 영어 수업이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해석 영어는 다른 과목과 마찬가지로 교사가 앞에 나가서 설명을 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석 영어와 작문 영어 사이에 불균형이 초래되고 마침내는 들을 수만 있고 말 할 수는 없는 벙어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해석 영어를 열심히 해서 많은 단어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 단어들을 쓸 줄을 몰라서 허둥대는 것이 대부분의 요즘 학생들이다.


우리 나라 영어 교육의 두 번째 문제점은 일관된 교육 정책의 부재(不在)에 있다. 이번에는 이렇게 해보고, 이번에는 저렇게 해보고 하는 식으로 정책이 왔다 갔다 하니 학생들은 학생대로, 교사는 교사대로 힘들어 진다. 이번에 실시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이 좋은 예이다. 사전에 충분한 의견 수렴도 하지 않은 채, 교육부 멋대로 실시하였고 실시하더라도 충분한 준비를 해야 할 것을 교사도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제멋대로 강행된 초등학교 영어 교육은 많은 폐단을 낳았다. 우선 교사가 준비되어 있지가 않다. 초등학교 교사들은 거의가 30대 이후 여 선생님들인데 몇 년간 안 하던 영어가 방학 때 연수 조금 받는다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가 있는가? 영어 선생님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대부분 나이를 많이 드신 교사들인데… 그런 선생님 밑에서 배우는 학생은 영어 공부가 제대로 되겠는가? 오히려 흥미 감소라는 부작용만을 낳을 뿐이다. 결국 교사는 교사대로, 학생들은 학생대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서투른 정책 결정과 성급한 시행이 어린 학생들과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우리 나라에 잘못된 영어 교육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우선, 반 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 현재 한 선생님이 50명을 데리고서는 영어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과목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특히 작문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교사가 학생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며 잘못된 영어를 바로잡아 줄 수 있도록 한 반의 인원이 더더욱 줄어야 할 것이다. 또, 교사들의 실력을 향상 시켜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해석 영어만이 아니라 작문 영어까지도 가르칠 수 있는 실력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앞으로의 수업 방식도 달라 져야 할 것이다. 단순 주입식이 아닌 토론, 대화식 수업이 이루어 져야 한다. 그리고 무분별한 Native Speaker의 교습은 피해야 할 것이다. 들이는 외화에 비해서 별로 효과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발음 교정 등 꼭 필요할 때만 교습을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겠다는 교육부의 일관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정책 결정 과정도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신중하고도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1세기가 몇 해 안 남아 있다. 앞으로 올 21세기는 정보화 시대이다. 그 정보화 시대에 살아 남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우리는 외국어, 특히 영어 능력의 함양이 필요하다. 교육부가 이 점을 명심하고 올바른 정책을 수행할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