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뿌리’를 읽고…

김수영 시선 거대한 뿌리를 읽고…


고등학교 때 국어 공부를 하면서 김수영의 시를 접하게 되었다. 왠지 그 시들이 맘에 들어 태어나 처음으로 시집을 사서 읽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시들이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었다. 몇몇 고등학교 참고서에 자주 등장하는 <풀>, <폭포>, <눈>, <푸른 하늘을> 등의 시를 제외하고는, 아직 시적 감각이 없는지, 몇 번을 읽어도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잘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알고 있는 만큼, 느낀 만큼만 어렴풋이 이야기하자면, 먼저 그의 으뜸 가는 주제는 ‘자유’이다. ‘자유’와 그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 그리고 억압받는 ‘자유’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작가 자신을 말하고자 한 것 같다. 특히 자신을 돌아보면서 분노를 느끼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연민의 정을 느끼기도 한다.(<강가에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이렇게 자조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나타내기도 했지만 이미 유명해진 <풀>, <눈>, <폭포>, <푸른 하늘을> 같은 시에서는 깨어있는 역사의식을 강조하기도 했다.


또, 그는 모더니즘 시인이다. 모더니즘은 <봉건적 요소>와 <감상주의>에서 탈피를 그 특징으로 삼는다. 따라서 비시적(非詩的)요소와 현대문명을 과감하게 도입한다. 이러한 모더니즘 요소가 그의 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시집의 제목으로 나온 ‘거대한 뿌리’라는 시를 살펴보면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남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이북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8. 15 이후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강자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 여사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에 조선을 처음 방문한 영국왕립지학협회 회원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세계로
화하는 극적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무단통행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외국인의 종놈, 관리들 뿐이다 그리고
심야에는 여자는 사라지고 남자가 다시 오입을 하러
활보하고 나선다고 이런 기이한 관습을 가진 나라를
세계 다른곳에서는 본 일이 없다고
천하를 호령한 민비는 한 번도 장안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 나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구문 진창을 연상하고 寅煥네
처갓집 옆의 지금은 매립한 개울에서 아낙네들이
양잿물 솥에 불을 지피며 빨래하던 시절을 생각하고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
버드 시숍 여사를 안 뒤부터는 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오히려 황송하다 역사는 아무리
더러운 역사라도 좋다
진창은 아무리 더러운 진창이라도 좋다
나에게는 놋주발보다도 더 쨍쨍 울리는 추억이
있는 한 인간은 영원하고 사랑도 그렇다

비숍 여사와 연애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진보주의자와
사회주의자는 네에미 씹이다 통일도 중립도 개좆이다
은밀도 심오도 학구도 체면도 인습도 치안국으로 가라
동양척식회사, 일본영사관, 대한민국관리,
아이스크림은 미국놈 좆대강이아 빨아라 그러나
요강, 망건, 장죽, 종묘상,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무식쟁이,
이 모든 무수한 반동이 좋다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위해서는
-제3인도교의 물 속에 박은 철근기둥도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좀벌레의 솜털
내가 내 땅에 박는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괴기영화의 맘모스를 연상시키는
까치도 까마귀도 응접을 못하는 시꺼먼 가지를 가진
나도 감히 상상을 못하는 거대한 거대한 뿌리에 비하면……




1연은 전혀 이해가 안가지만, 작가는 우리 전통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 보이고 나아가 ‘거대한 뿌리’ 라고 표현하고 있는 조국에 애정이 깊은 것 같다. 이념, 겉치레, 껍데기, 불행한 역사의 유물, 외세를 배격하고 전통과 사회적 약자에게 따스한 눈길을 주고 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단정적이 어조를 씀으로써 담담하고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시는 가슴으로 느껴야한다는데 이해를 못하니까 음미할 수가 없었다. 시를 즐기고는 싶은데 앞으로 어떻게 시를 감상해야할지… 시를 이해할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다. 내가 너무 어려운 시집을 고른 것일까?


<풀>, <눈>, <폭포>, <푸른 하늘을>에 담겨진 작가의 역사의식이 좋아서 김수영 시집을 구입하였지만 그밖에는 마음에 드는 시를 찾지 못했다. 역시 너무 어려워서 인가? 아무래도 다독하는 수 밖에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