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을 읽고…

 

전 태 일  평 전  조영래 지음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 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스로 몸을 불사른 청년. 22살의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젊은이. 그는 왜 죽어야만 했던가? 무엇을 위해 자기 목숨까지 바쳤는가? 이런 질문을 풀려면 우리는 ‘전태일 평전’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전태일이 활동했던 시대는 1960년대 말과 1970년 까지이다. 이 시대는 박정희 정권이 새마을 운동을 의욕적으로 추진했던 시대로써, 우리 나라의 모든 산업이 발달해 나가던 때였다. ‘조국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농지는 공장이 되고, 새로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섰다. 젊은이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었고, 전태일과 그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서울은 약속된 땅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서울에서도 거의 실업자로 지냈고, 어머니는 식모살이, 날품팔이로 겨우 겨우 가족을 먹여 살렸지만 지독한 가난을 벗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태일은 그렇게 하고 싶었던 학교 공부도 그만두고, 공장에 나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간 곳이 평화 시장 옷 공장이었다. 태일은 그 곳에서 노동 지옥을 목격하게 된다. 하루 15시간 중노동에, 1평에 4명이 일해야하는 좁은 작업장, 커피 한 잔 값밖에 안되는 일당, 어두운 조명, 엄청난 먼지, 화학 약품 냄새, 허리를 필 수 없는 다락방, 2천명이 함께 쓰는 3개의 변소. 이러한 작업 환경으로 말미암아 5년 정도 평화 시장에서 일하고 나면 영양 실조와 소화불량, 신경통, 신경성 위장병, 류머티즘밖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야말로 이건 품팔이가 아니라 피팔이였다. 하루하루 자신의 몸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이런 노동 지옥을 보면서 태일은 억울한 생각이 들었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런 법이 있다는 얘길 들은 태일은 없는 돈에 근로기준법 책을 사서 그 어려운 법률 책을 독파해 나갔다. 그 때부터 외롭고 처절한 태일의 노동운동이 시작된다. 우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하고 정부 당국에 이러한 실상을 고발하고 사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토록 믿었던 근로 감독관과 노동청에게 실망한 태일은 이러한 활동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동안 공사장에서 맘을 먹고 다시 평화 시장으로 돌아온 태일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투쟁. 또 투쟁. 그러나 사회라는 벽은 결코 허물어지지 않는다. 이미 생명까지 바치기로 맘먹은 태일은 이 두껍고도 두꺼운 사회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 1970년 11월 13일 2시경, 온몸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인 태일은 길거리로 뛰어들며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노동자를 혹사시키지 말라!’는 몇 마디 구호를 외치고 숯덩이가 되어가는 태일을 구하러 온 친구들에게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마지막 구호를 외치고 10시경 병원에서 숨을 거둔다.


죽어 가는 작은 생명들에 대한 사랑, 사회라는 거대 조직에 대항할 수 있었던 그 용기, 그리고 외로운 싸움을 지탱해준 의지. 이것들이야말로 청년 열사 전태일의 정수였다. 이런 것들이 있었기에 그의 죽음은 눈물겹고, 감동적이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사회의 벽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죽음은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에게 평화 시장의 참상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죽음이 노동운동의 불씨를 당겼던 것이다. 그 이후로 노동운동은 계속되어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전태일. 22살의 그 젊디 젊은 나이에 분신자살을 한 젊은이. 그는 영원히 한국 노동운동의 지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