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의 ‘토지’ 13권(5부 1권)을 읽고..

16쪽: 그리움이며 고마움이며 한 인간의 심신을 형성해준 요람이었을지라도 그 인연들이 형체 없이 사라지고 청산이 되었는데 죽음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영원한 침묵의 냉엄함과 망각의 비정,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4쪽: “그렇습니다 선생님. 생각해보면 나쁜 조건에서 태어난 제가 평생 쓰고도 남을 선물을 받은 거지요. 피도 살도 닿지 않는 분들께서 너무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중에서도 꾸밈없고 우러나는 그분들 애정은 시궁창에 떨어질 수도 있었던 저를 건져주셨지요.”

57쪽: “달콤한 꿈이 없어서 인정 안 하려는 자네와 달콤한 꿈을 꾸지는 않으나 목숨을 거는 사람, 그 차이점 때문이다.”

63쪽: 달을 보고 길 떠난 사연

130쪽: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전적인 부정 그것이었다. 지리산 골짜기든 만주 벌판이든 자신은 그들과 함께 있어야 했다는 뼈저린 통한, 사명감도 양심의 소리도 아니었다. 길상은 다만 자신의 삶의 진실한 의미를 물었던 것이다.

294쪽: 한 개인의 삶은 객관적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불행이나 행복이라는 말 자체가 얼마나 모호한다. 가령 땀흘리고 일을 하다가 시장해진 사람이 우거짓국에 밥 한술 말아먹는 순간 혀끝에 느껴지는 것은 바로 황홀한 행복갑이다. 한편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도 입맛이 없는 사람은 혀끝에 느껴지는 황홀감을 체험할 수 없다.
결국 객관적 척도는 대부분 하잘것없는 우거짓국과 맛좋은 고기 반찬과의 비교에서 이루어지며 남에게 보여지는 것, 보일 수 있는 것이 대부분 객관의 기준이 된다. 사실 보여주고 보여지는 것은 엄격히 따져보면 삶의 낭비이며 진실과 별반 관계가 없다. 삶의 진실은 전시되고 정체하는 것이 아니며 가는 것이요 움직이는 것이며 그리하여 유형무형의 질량으로 충족되며 남는 것이다.

311쪽: “자네 말이 맞네. 원력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

383쪽: 그에게는 교리 같은 것은 도통 관심이 없었고 복잡할 필요도 없었다. 세상을 바꾸어놔야 한다는 것, 배고프고 핍박받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그의 정열의 모든 것이었다.

453쪽: …지배자의 고독은 처절한 것이다. 지배자는 지배하기 때문에 불행한 것이며 지배당하는 자는 재산 목록이 되고 박제품이 되어 훼손되기 때문에 불행하다. 결국 상호가 다 불행한 것이다.

461쪽: …자멸 자살을 강요당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