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 예비군 훈련 가서 읽은 게 생각나서 옮겨 옴.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내 한 몸 건사하기도 턱없는 주제에 여러 지면 통해 남들 고민을 상담씩이나 하게 된 지가 그럭저럭 몇 년이다. 시답잖은 답변일지언정 응대한 사연이 족히 세 자릿수에, 그리 못한 수가 또 그 몇 배니 그 덕에 대한민국의 일반인들이 대체 어떤 사적 고민을 안고 사는지에 대한 대략의 윤곽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데이터든 일정량 이상 축적되면 최소공배수가 발견되기 마련, 그동안 접한 거의 모든 고민은 다음 몇 가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직업에 대한 고민이든, 사랑에 대한 고민이든, 미래에 대한 공포, 그 두려움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황망해들 했다. 사실 불확실한 걸 무서워하는 것까진 전혀 문제없다. 그게 두려워 징징거리는 것까지도 누구나 하는 짓이고. 문제는 공포, 그 자체를 문제 삼는다는 거다. 불확실성은 삶의 본질인데, 무서운 건 너무 당연한데. 그 무서움에 어떤 방식으로 맞서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를 결정하는 건데. 대부분은 무서움, 그 자체를 무서워한다. 그래서 무서움이 아예 사라지길 원한다. 자궁 속 태아 이외 그런 건 없는데 말이다.


  두 번째.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도 모른다.


  그래서 남들한테 물어선 도저히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을 그렇게들 해댄다. 예를 들어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헤어져야 하느냐 따위의 질문들은 결국 스스로 어떤 삶을 원하는지, 삶에서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그 행복을 얻기 위한 대가로 어디까지 지불할 각오가 되어 있는지에 달렸다. 그러니까 그런 고민은 결국 자신밖에 답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 본원적 질문은 건너뛰고 그저 남들은 어떻게 선택했는지만 궁금해한다. 자신이 언제 행복한지 스스로도 모르니 그럴수밖에.


  세 번째. 자신이 너무 중요하다.


  물론 다들 자신이 중요하다. 그런데 유별난 고통은 자신이 겪고 있는 통증만은 특별히 유난하고 각별하다 여기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왜 하필 자기만 그런 걸 겪어야하는 건지 억울해하고 분해한다. 그러나 한편의 소설이라며 풀어놓는 좌절과 분노의 내막을 듣고 보면 그 정도 갈등 없이 세상사는 사람 대체 어디 있나 싶은 정도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자기 돌보는 데만 여념이 없다 보니 남들 고통은 어떤지 살필 보편감성이 부족한 게다. 이 공감 능력의 결여는,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객관화가 안 됐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게다.


  나이와 학력에 상관없이 발견되는 이들 공통점의 공통점이 또 있다. 뭐냐. 어른스럽지 않다는 거. 사회경제적으로 명백한 성인이어야 할 나이와 위치인데, 어른이, 아니다. 혀여 지난 몇 년간 상담 끝에 나름 도달한 결론은 이렇다. 최근 우리 사회가 어른 육성에 실패하고 있다고. 내가 언제 행복한지 알고 담담하게 삶의 불확실성을 스스로 맞서는 어느 순간, 아이는 어른이 된다. 그런 어른을 만나기가, 매우, 어려운 세상이다.


  근데 이 성장 지체는 대체 누구 탓일까…


( 월간 ‘샘터’ 2008년 4월호 )